예전에는 혈액형에 따라서 성격을 파악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A형인 사람들은 신중하며 소심하고, B형들은 자존심이 세고 까칠하며, O형들은 솔직하고 활달하며, AB형들은 시크하면서 좀 특이하다' 뭐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이런 것을 주제로 만화, 영화, 노래, 연애/궁합 등등에서 많은 소재 거리가 되었었습니다. 과학적으로는 근거가 부족한 믿거나 말거나지만, 재미가 있으니 꽤나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었습니다.
요즘은 아무도 '혈액형별 성격'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MBTI 성격검사 결과를 이야기합니다. 알려진 데로 MBTI는 공동개발자인 딸 이사벨 브릭스 마이어스(Myers)와 엄마 캐서린 쿡 브릭스(Briggs)의 이름의 앞글자를 따서 'Myers-Briggs Type Indicator'라는 이름이 붙여진 성격 검사 도구입니다. 외향(E)과 내향(I), 감각(S)과 직관(N), 사고(T)와 감정(F), 판단(J)과 인식(P)의 네 가지 척도로 구성됩니다. 간단한 검사를 하면 이들 네 가지 척도에서 각각 하나의 성향으로 선택되기 때문에, 이를 조합하면 총 16개의 성격 유형으로 구분되게 됩니다. 저도 검사해 보고, 저희 가족이나 지인들도 검사를 해 보았는데요. 제가 보기에는 혈액형에 따른 성격처럼 완전히 엉뚱한 건 아니고, 어느 정도는 신빙성이 있어 보였습니다. 어쨌거나 이런 검사의 신뢰도도 신뢰도지만, 남녀노소 MBTI 검사를 하고 나서 내 성격은 **** 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들을 보면 엄청나게 히트 친 것만은 누가 뭐래도 분명해 보입니다.
2005년에 'B형 남자친구'라는 영화가 개봉을 했었습니다. 잘생긴 영화배우 이동건 씨가 남주를 맡아서 열연을 펼쳤던 이 영화에서는 'B형 남자'는 까칠하고 쪼잔하면서 괴팍한 최악의 남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 덕에 가뜩이나 별로 인기 없었던 B형 남자들의 인기가 뚝~ 떨어졌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제가 B형 남자이기 때문이죠. 하여간 'B형 남자는 애인으로서는 최악이다.'라는 편견이 이제 겨우 사라졌나 했는데 언젠가부터는 T가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너.. 혹시 T야?"
이 말은 MBTI 세 번째 항목 사고(T)와 감정(F) 중에서 사고형(T)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일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공감하지 않고, 사실에만 입각하여 이성적인 해결책만을 제시하는 사람을 에둘러 비판하는 의미입니다.
유행의 시작은 유튜브 '밈고리즘'이란 채널의 '[폭스클럽] EP 1 여자들의 헌팅준비 과정'이라는 영상이라고 합니다. 이 영상은 (F) 성향의 여성 두 명과 (T) 성향의 여성 한 명으로 구성된 일행이 홍대 앞에서 본격적으로 헌팅을 시작하기 전에 술 한잔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구성한 에피소드입니다. 자기들끼리 식당에서 술을 한잔 하면서 (F) 성향의 여성이 촬영중인 연하의 PD에게 눈웃음을 살살치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야 이거 남자들 꿈뻑죽어~!!"
그러자 (T) 성향의 여성분이 그 말을 듣자마자 정색하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죽은 사람은 없잖아."
그러자 (F) 성향 여성분이 토라져서 이렇게 되묻습니다.
"언니이이이~ T야?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떠덩이(가명, 중학생 딸, 14세)가 울고 있고, 아내가 그런 딸을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잉잉~ 기말고사 망쳤어. 밤에 잠도 못 자고 열심히 공부한 건데~ 흑흑~"
"우리 떠덩이 공부 열심히 했는데 시험 결과가 원하는 데로 안 나와서 속상하겠구나~ 다음에는 실수하지 말고 잘하면 이번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러길래 제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밤에 잠만 안 자면 뭐 하냐? 공부 안 하고 밤새 유튜브랑 앱툰이나 보니까 성적이 안 나오지."
떠덩이가 울다 말고 갑자기 왼팔을 가슴 높이에서 옆으로 하고 오른손은 손 끝을 왼팔 중앙쯤에 가져다 대서 T자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뜬금없이 웬 타임요청인가 하는 순간 저를 째려보면서 소리를 빽 지릅니다.
"아빠아아~!! T야?"
"응. 아빠 ISTJ잖아"
"아 몰라! 앞으로 아빠랑 얘기 안 해!"
라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달라며 아내에게 눈을 마주쳤습니다.
"으이그~ 그렇게 딸아이 좋아하면서 말은 왜 꼭 저렇게 안 이쁘게 하는지 몰라~ 그것도 재주야."
"왜? 위로해 준다고 웹툰에서 시험문제 나오는 건 아니잖아?"
네.. 저는 ISTJ입니다. 그것도 상당히 %가 높은 파워 T입니다. 실제로 마음에도 없는 말로 공감이나 위로해주고 이런 거 잘 못하고, 누가 고민하고 있으면 객관적으로 분석해서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싶은 게 사실입니다. 시험 잘 보고 싶으면 공부하고 문제를 열심히 풀어야지, 핸드폰 가지고 놀며 밤만 새웠다고 해서 시험 문제가 스스로 풀리는 건 아니잖아요?
'B형'이 무슨 죄라고 젊었을 때 소개팅 나가면 당당하게 'B형'이라고 말을 못 했습니다. 상대가 혈액형을 물어오면 우물쭈물하다가 'B형은 B형인데 사실은 BO기 때문에 난 그렇게 이상하지 않아'라고 해서 겨우 결혼했는데, 이제는 또 T가 말썽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