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장애가 있는 거야!
"OO 마트 좀 들렀다 가요"
외출했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 마눌님이 물건을 사겠다고 한다. 대형 마트도 아니고, 집 앞에 있는 곳도 아니다. 조합원을 모집해서 유기농 상품을 파는 작은 마트인데 집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이다. 근처까지는 잘 찾아갔다. 가끔 들렀던 곳이기는 한데 정확하게 위치를 모르겠다. 차의 속도를 줄이면서 물었다.
"여.. 기... 쯤.... 아닌가?" 감으로는 이 근처 어딘가에서 세워야 할 것 같은데 마트는 안 보인다.
"어휴, 나하고 여길 몇 번이나 왔는데 아직도 그걸 몰라요? 저 앞에 삼거리 지나서지...."
살짝 한 숨을 쉬면서 핀잔을 준다. 내가 살면서 구박을 듣는 몇 안 되는 일 중에 하나다.
나는 워낙 성실하고 착한 남편이라 이런 단점마저 없으면, 마눌님은 세상 모든 아내들의 절대 권력인 바가지를 사용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쓰고 나니 오글거린다) 나는 '길치'다.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발명품이 내비게이션이다. 이 녀석이 없었더라면 개고생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운전은 물론이고 낯선 곳에서의 약속 장소를 찾을 때도 마찬가지다. 단순하게 지도를 가지고는 못 찾는다. 요즘이야 앱을 켜면 걸어가면서도 확인이 가능하니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나를 위한 발명품이다. 나는 월 사용료를 내고라도 이 서비스를 이용할 충분한 자세가 되어 있다. 마눌님께 이런 면박을 들은 건 한두 번이 아니다. 너무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다. 내가 자주 쓰는 응대법은 이렇다.
"아직 스무 번 안 왔나 보지, 난 스무 번쯤 되어야 익숙해지거든"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리 여러 번 왔던 곳이라도 난 늘 헷갈린다. 그냥 '길치'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진짜 한 스무 번쯤 지나면 제법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지금 생각하니 성격에도 꽤나 영향이 있었을 것 같다. 길을 잘 모르니 어딜 돌아다니는 것이 불편했을 터이고 아는 길만 쳇바퀴 돌 듯 다녔던 건 아닐까? 학교와 집. 회사와 집. 사실 나는 강남 지리도 잘 모른다. 거기서는 방향 감각이 없다. 집은 강서 쪽이고 회사는 영등포, 남대문, 광화문이었다. 가끔 약속이 있어 나가 보는 강남은 늘 헷갈렸다. 지금도 그렇다.
뒤에 앉아 있던 아들이 한마디 한다.
"엄마, 아빠는 지금 장애가 있는 거야. 병인데 고칠 수도 없으니까, 안타까워해야지 뭐라고 할 게 아니야~~"
이게 무슨 말이지?
순간 띵 했지만 평소 가족들과 꼭 필요한 내용이 아니면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 않는 아들이 입을 뗀 것이라 토를 달지 않았다. 나를 옹호하는 발언 같기는 했지만, 뭐 나더러 장애인이라고? 이 녀석이 뱉은 말이 욕인지 뭔지 분간이 안 되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는 곳이 있다. 집에 돌아와서 네이놈. 그놈에게 물어봤다. '길치는 병'이라고 검색을 했다. 병이라고 해 놓은 곳도 있긴 하다. 좀 애매하지만 그!렇!다? 길치는 병이다. 고칠 수 없는 병이 분명했다.
길치
공간지각력이 낮아 길 또는 방향을 찾는 능력이 떨어지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을 칭하는 말. 인지도가 비교적 낮고 부각이 잘 안 될 뿐이지 길치도 일종의 장애다. 선천적으로 뇌의 방향 감각 능력이 일반인보다 현격히 떨어지는 발달장애의 일종이다. 시각장애가 시력이 낮고 색약, 색맹이 색각에 이상이 있는 것이라면, 길치는 공간지각력이 남들보다 떨어지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다시 말해 훈련이나 학습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지도를 보는 훈련 같은 걸 한다고 해서 딱히 나아지는 게 아니다.
나는 보험회사를 다녔다. 생명보험, 손해보험 다 거쳤다. 그런데 그 흔한 전 국민의 보험인 실손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 이유는 있다. 잘 아프지도 않지만 부러진 게 아니면 병원을 찾지 않는다. 어느 해는 연말정산 할 때 보니 의료비가 단 한 푼도 없었던 일이 있을 정도다. 그런 내가 사실은 불치의 병을 안고 살았던 환자였다니. 놀랍다.
갑자기 병이 생겼다. 이제 아픈 척하면서 살아야겠다.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에서 나 같은 방향치가 지금까지 길을 잃지 않고 살았던 건 큰 행운이다. 앞으로도 정신 차려서 살아야 한다. 나이 들어 길을 잃으면 큰 일이다. 늘 곁에서 길을 알려준 마눌님 덕분이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