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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Sep 16. 2024

20주. 일상의 달리기, 일상 단절의 달리기

속도를 높이진 않았으니 줄행랑은 아니겠지.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너무 초보 티가 났다. 커다란 면 티셔츠를 입었고, 살은 하얗고 물렁거렸다. 달리는 폼도 물론 어설펐고, 모자나 고글 같은 아이템, 기능성 운동복 안팎으로 드러난 근육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러너의 아우라가 없었다.


아. 러너의 아우라. 초보인 내 눈에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달리기 능력 향상을 위한 훈련으로서의 달리기였고, 다른 하나는 일상으로서의 달리기였다. 내가 부러웠던 건 후자였다.


그들의 행색, 눈빛, 다리의 움직임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달린 거리나 페이스를 체크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듯이, 누군가 자신을 볼 수도 있고 안 볼 수도 있는데 그런 건 상관없는 것처럼 달렸다. 무심하게.


달리러 나가고 들어올 때 거울을 보면서, 나도 이제 완전 초보 티는 벗은 것 같군,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거울에 비치는 모습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달리러 나가기까지 짧아진 시간. 운동복과 아이템 장착이 능란해지기도 했지만, 그다지 고민 없이, 크게 마음먹지 않고 달리기를 하러 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리기를 하고 나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날의 일상. 오히려 하지 않는 날에 어딘가 빈틈이 느껴진다.





어느덧 자연스럽고 당연해진 달리기지만, 어느 날엔 달리기가 문득 떠오른다.


머리가 복잡할 때, 마음이 번잡할 때, 일상이 어수선할 때 나는 이 순간에서 탈출시켜줄 카드로, 이곳에서 구원해줄 약속의 땅으로, 그게 무엇이든 일단 끊어줄 단절의 벽으로 달리기를 잡아챈다.


나가자.

달리자.


일상의 공간을 떠나, 일상의 소리를 끈다.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쉬지 않고 발을 구르고, 숨을 고르는

데 집중한다. 멈춰 있는 모든 것을 몸을 움직이며 바라본다. 끊임없이 달라진다. 줄곧 흘러간다.


어느새 나는 다른 세상에 와 있고, 나 역시 다른 존재가 되어 있다고 느낀다. 돌아가면,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다르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믿음이 생긴다.





지난 토요일 아침엔 동네를 두 바퀴 돌았다. 나를 따라 나온 첫째는 걷뛰를 하고, 셋째는 자전거를 탔다. 한 바퀴를 돌고 발개진 얼굴로 집에 들어갔다.


드디어 나만의 달리기. 나는 한껏 '독립'을 느끼며 달렸다. 세상에 나만 있는 것처럼. 내가 지나가면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그러다 큰 찻길로 나 있는 골목길 앞이었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저쪽에서 차가 오고 있었는데, 순간적이고 무의식적인 판단으로, 내가 먼저 지나는 게 맞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달리기를 멈추지 않고 횡단보도에 들어섰다. 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횡단보도 끝부분에선 거의 들이밀다시피 내게 다가왔다.


간발의 차이였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발은 관성으로 그대로 몇 발자국 더 나아갔지만, 고개가 홱 돌려졌다.


미쳤나 봐!!!


그런데... 차 창이 열려 있었다. 담배를 문, 50대로 추정되는 남자는 내 말이 들렸는지(들리지 않을 수 없는 크기였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앗...차, 싶었지만,


촴...나!!!


너무 기가 막혀서 한마디가 자동으로 붙었다. 그리고 그대로 달렸다. 평소와 달리 차도와 떨어진 골목길로 달렸지만, 속도를 높이진 않았으니 줄행랑은 아니겠지.





만약 그 운전자의 상식이 나와 다르다면, 그래서 그가 나에게 싸움을 걸거나 해코지를 한다면, 나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나의 하루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더 우아하고 지혜롭게, 덜 감정적이고 냉철하게 반응할 수 없었을까?


나는 어쩌자고 툭 치면, 탁 하고 감정적인, 격앙된, 공격적인 반응을 내뱉는 것일까? 언제든, 누구에게든 그런 식으로 하면 좋을 게 없다는 걸 아직 모른단 말인가?


나는 그로부터 이어지는 생각들로 돌아오는 길 내내 번뇌했다. 온통 복잡하고 번잡스럽고 어수선했다.


나는 여전히 나였을 뿐이잖아. 어떤 평정심은, 어떤 평화처럼 가짜일지도 모른다. 모든 게, 정확히는 달리기가 부질없다는 생각에 허망했다.





그날 남은 하루를 착잡하게 보냈다. 그리고 밤에 길고 긴 일기를 쓰면서, 어떻게 했어야 비굴하지도 않고, 지지 않는 싸움을 했을 수 있을까 시뮬레이션을 거듭했다. 약자와 권력과 계급과 그것을 드러내는 상징과 익명성과 무지에 기인한 불안에 대해 질문도 아니고 결론도 아닌 문장들을 끝 모르게 써나갔다.


그러다 불현듯 낮엔 한 적 없는 생각이 끼어들었다. 아니, 가만있어 봐. 그렇게 분노할 일이었잖아? 발끈하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어!


나는 나에게로 문제의 원인을 돌리고, 모든 경우의 수에 타격받지 않을 방법을 강구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토록 마땅한 생각이 (확실히 지나간 사건이 된) 이제서야 든 이유와 닿아 있었다.


별로 유쾌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뭘 어떻게 바꾸겠다고 발버둥칠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한낱 인간, 모든 인간에게 강자일 수는 없는 개인으로서 별별 일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될 일 같았다. 절로 겸손해질 뿐이다.





달리기가 일상에 녹아드는 일, 달리기를 가지고 일상이 아닌 시공간에 존재하는 일, 그러다 그곳에서도 일상과 통해버리는 일. 그런 일들을 겪으며 나아가는 중이다.




요약

달리기는 일상이면서 일상이 아니다. 



호수는 이렇게 잔잔하다. 눈에 담으며 달리다 보면, 나도 그리 되는 것만 같은데.


달리기 좋은 날씨가 오다 말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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