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도 헤도헨 Sep 23. 2024

21주. 철딱서니 없는 우주로

달리기는 핑계 대지 않고 한다.

사실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움직이는 건 성취감보다 더 본성에 닿아 있는 감정이다. 예를 들면 재미 같은 것.
 
ㅡ김상민, <아무튼, 달리기>


읽겠다고 빌려놓은 책들과 사버린 책들을 보면, 잠깐은 한숨이 나온다. 놀랍도록 다양한 차원으로 손 대면 나아질 집 안 곳곳을 보면, 주부의 자아는 살짝 괴롭다. 하지만 나 혼자 마치 하루가 서른 시간인 양 느긋이 살다가 잘 때가 되어서야 '이런, 이만 하루를 마감해야겠네?' 하고는, 그날 하지 못했던 일들이 사실 그다지 아쉽지 않았던 모양이라고 자각 당한다.


그 와중에 달리기는 핑계 대지 않고 하고 있다.





'우중런(빗속 달리기)'에 대해 들을 때마다 호기심도 일고 한번 해볼까 하는 괜한 객기 같은 것도 솟았지만, 비가 오는데 굳이 나가게 되진 않았다. 비나 눈은, 운치나 낭만보다 뒷감당과 닿아 있는 이벤트가 된 지 오래니까.


지난 금요일, 한 바퀴 돌면 딱 10km인, 들어서면 빠져나갈 길 없는 호수 둘레를 돌기로 했을 때 하늘엔 구름이 잔뜩이었다. 예보를 보니 비가 오긴 올 모양이었다. 한 시간만 이따가, 다 달리고 나서 오면 좋겠네, 그런 바람을 흘깃 품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어떤 우주로 튀어볼까, 채널을 훑었다. 달리기를 하면서 유일하게 더할 수 있는 행위는 듣기. 어떤 소리로 채우느냐에 따라 꽤나 다른 달리기를 경험한다. 아예 다른 세계에 접속하는 것 같을 때도 있다.


뉴스를 들을까, 오디오매거진을 들을까, EBS 반디를 들을까 하다, 음악 앱에서 찬양 모음을 재생시켰다.


유튜브 '션과 함께'의 한 영상에서 션은 '달리기 할 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때마다 다른데 기도할 때가 많지. 기도하고 찬송 부르면서." 나는 그 말을 듣고 오래된 허무개그가 떠올랐다.


어느 골초 신자가 목사님께 질문했다. "기도하면서 담배 피워도 되나요?" 목사님이 대답했다. "안 됩니다."
실망한 골초는 다른 날 다시 물었다. "담배 피우면서 기도해도 되나요?" 목사님은 힘주어 말했다. "그럼요. 무슨 일을 하면서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나도 골초의 얍삽함을 가지고 있었다. 달리기를 하면서까지 기도를 하는 션과는 다르게, 나는 '오호라, 기도는 달리기 할 때 하면 되겠군'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찬양을 들으며 성스러운 기분에 사로잡혀 달렸다. 연휴의 여파인지, 비 예보 때문인지 달리는 사람도, 산책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갑자기 바람이 시원하게 휘몰아치더니, 후드득, 비가 쏟아졌다. 굵은 장대비에 머리칼도 옷도 순식간에 젖었고, 앞이 잘 안 보였다. 안경을 벗어서 손에 쥐고, 젖은 흙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땅바닥만 보며 발을 내디뎠다.


한참 그러고 달리는데 무언가 나를 똑똑, 두드리는 것 같았다. 잠깐, 나오실래요?


음?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비가 오는 이곳은 다른 세상이었다. 새도 날지 않고, 벌레도 숨고, 사람도 다니지 않는, 어쩌다 밖에 있던 사람은 우산으로 몸을 가리고 서둘러 가는, 이 안에서 닫힌, 혹은 어딘가로 열렸을지 모를 세계였다. 어느새 땀이 식어 시원하다는 걸 알아챘다. 상쾌했다. 발이 가벼웠다. 빗소리에 섞인 찬양 소리도 끝내줬다.


마침 반대방향에서 오던 다른 러너가 나를 보고 외쳤다. "화이팅!" 나도 곧바로 답했다. "화이팅!!"


비는 그러다 멈추기도 했고, 다시 추적추적 이어지기도 했다. 한번 젖은 몸은, 이후로는 아무려나 상관없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괜히 신이 났다. 나는 달리는 내내 웃고 있었다.


바람만큼 달리기 실력은 늘지 않고, 생각보다 드라마틱한 일상이나 몸의 변화는 없지만... (씨발,) 이거 너무 재밌잖아!




요약

우중런, 재미있다. 달리기의 재미 중 하나.



아참, 조정하는 분들도 있었다. <레슨 인 케미스트리>를 읽은 이후 이들이 심상치 않게 보인다... 암튼 이분들에게도 멀리서나마 '화이팅' 보내드렸다.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 언니와 동네 한 바퀴. 이렇게 다 커서 언니랑 뛰어다니는 것도 좋고.


가을이 와핬구나~



이전 20화 20주. 일상의 달리기, 일상 단절의 달리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