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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Sep 30. 2024

22주. 취미의 빛 (마라톤 10K/강화)

정말 잘 놀았다는 생각뿐이었다.

제가 보면 볼수록 노는 것도 힘든 일이고요. 노는 것을 인생 전반부에 잘 계발하신 분들이 후반부에 승리하는 거를 아주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ㅡ정신과전문의 윤대현, 유튜브 <이런 말을 하는 순간 망하는 겁니다> 중에서



완벽한 가을날이었다. 하늘은 파랗게 맑았고, 산산한 바람은 잘도 불어왔다. 그러나 구름 한 점 없고 나무 한 그루 없는 주로에서 맞는 햇볕은, 가을볕엔 며느리 아닌 딸을 내보낸다는 속담을 의심케 할 만했다. 어쩌면 봄볕이고 가을볕이고 아들은 안 보냈다는 데에 진실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어머니도 친정엄마도 시키지 않은 마라톤을 뛰었다. 엄마도 장모님도 내보내지 않으니 아내라도... 그런 건 아니지만, 남편도 끌고 나왔다. 오프라인 마라톤은 나는 세 번째, 남편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나를 지원하기만 했던(이동, 사진, 아이들 돌봄 등) 남편과 함께 대회에 참가하려니 뭔가 새로운 구석이 있었다.


이것도 경험이라고 익숙해졌는지,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태평했다. 전날 잠들기 직전 짐을 꾸리면서도 나는 설렘도 떨림도 없었다. 긴장도 걱정도 없었다. 사고가 없다면 완주할 것이고, 기록 단축이나 수상 같은 것엔 무관심하며(관심 있다 한들...), 참가 자체만으로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었다.


그런 내 눈에 남편은 호들갑이었다. 며칠 전부터 날씨 앱을 보면서 궁시렁거리더니, 결국 마라톤 당일 강화의 날씨가 쨍하게 맑을 것이 확실해지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조리에 휩싸이기라도 한 것마냥 투덜댔다. 구글맵으로 코스를 한참 찍어보고서는 나무 한 그루 없는 곳이라며, 세상 해괴한 일을 다 본다는 듯 툴툴댔다.


지난주 나름대로 훈련 계획이 있었나 본데, 야근과 날씨 탓으로 그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자 형언할 수 없이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공부하려고 했는데!' 외치는 꼴찌, '효도하려고 했는데!' 한탄하는 불효자, '친구 만나러 나가려 했는데!' 유감스러워하는 극 I의 과장된 안타까움이 겹쳐서, 한 마디 하고 싶은 걸 꾹 참느라 혼났다.


게다가 우리는 새벽부터 바쁠 예정이었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동안 세 아이들을 어찌할까 고민하다, (사실 그리 가까운 것도 아니지만) 강화 가는 길에 사는 시동생네에 맡기기로 했다. 평소보다 두 시간쯤 일찍 아이들을 깨워 아침을 먹이고 출발, 시동생네 집에 아이들을 떨구고 강화함상공원으로 이동, 마라톤 대회 참가, 근처 대중목욕탕에서 씻고, 시동생네로 와서 다같이 점심,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그래서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초저녁부터 아이들을 채근하는데,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남편을 우스워하는 것도 민망한 것이, 채 3개월도 되지 않은 나의 지난날을 적나라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을 때, 그것도 온라인 마라톤, 심지어 3킬로미터 종목이었는데, 나는 얼마나 초긴장에 저기압이었던가 말이다. (9주. 나만 아는 성취/마라톤 3K)


어쨌거나 나는 날 때부터 개구리였던 양, "날씨가 어떻든, 주로가 어떻든 상관없이 달리는 거지. 최적의 상태에서 달리길 바라는 건 러너의 자세가 아니야."라고, 올챙이도 하루키 옹도 웃고 갈 말을 똑부러지게 던졌다.





문제는 내가 너무 태평했던 나머지, 조금 느긋이 일어나서, 좀 더 꼼꼼하게 나갈 채비를 하고, 막상 마라톤 대회에 관해서는 별 대비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어랏, 강화로 가는 길이 예상보다(라고 하기엔 나름 철저한 인간으로서 그 시간대 교통상황과 소요시간을 체크하긴 했었는데...) 막히네?를 시작으로, 어찌어찌 (집결 시작 시간은 아니지만) 사전행사 중에 도착하긴 했건만... 어머낫, 주차장이 만차네? 난감한 상황이 이어졌다. 지난 대회 리뷰를 훑었을 때 분명 주차장은 널널하다고 보았는데...(그러나 내가 제대로 보았던 건지 확신할 수 없다) 


화장실을 들러야 할 상태여서, 이제 나도 급해졌다. 공원 주위를 세 바퀴째 돌고서야 다른 많은 차들이 그랬듯, 한국인의 유도리를 한껏 발휘하여 (물론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남편의 것이었다) 주차를 완료했다.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다시 공원으로 준비운동이라 치자며 달려갔다.


제발 화장실이 많기를... 바랐으나 마라톤 대회의 참맛이라는 듯, 보이는 화장실 두 곳 모두 줄이 쫘악 늘어서 있었다. 줄을 선 채로 대충 준비운동을 하면서, 사회자의 안내사항에 이어 대회 시작을 알리는 폭죽 소리를 들었고, 하프코스 출발 신호를 들었다. 남편이 선 줄이 나의 줄보다 빨리 짧아졌고, 먼저 나온 그에게 나는 가라고 너그럽게 말해주었다. 곧이어 우리의 종목 10킬로미터 출발 신호가 들렸다. 먼저 출발하라고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문이 왔다. "제일 마지막에 출발할게."


이런 눈물겨운 의리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출발해야 할 때까지 난 화장실 줄에 서 있었다. 아마도 살아오면서 가장 긴급하게 일을 마치고 스타트라인으로 뛰었다. 5킬로미터 출발 직전이라 참가자들이 스타트라인 앞에 똘똘 뭉쳐서 모여 있었다. 그들보다 먼저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에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틈을 비집고 들어가 출발선을 넘었다.


(참가자마다 칩을 붙이고 기록을 측정하는 넷타임 방식이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5킬로미터 참가자들과 함께 뛰어도 상관없을 듯하지만, '길을 모르는/잃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는 나로서는 이들 무리에 섞여 있다가 길을 잘못 들지도 몰라서 무조건 10킬로미터 무리에 합류하고 싶었다.)





휑했다. 아무도 없었다. 타인의 열기와 체취에 휩싸여 와르르 몰려나가는 특별한 순간을 놓쳤다. 몇백 미터쯤 뛰자 두어 명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이건 동네에서 혼자 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게 뭔가? 여긴 왜 왔던가? 혼란스러워하며 마땅한 나의 무리를 찾아 뛰어갔다. 준비운동도 제대로 못했는데, 페이스 조절이고 뭐고 없었다.


내 친구 주자들의 흔적을 찾는 동안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맘때쯤 열리는 여러 마라톤 대회 중 강화마라톤을 선택한 이유는 강화'해변'마라톤이었기 때문이었는데, 바다가 느껴지지 않았다. 바다와 주로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딱히 없었지만 바로 '옆'은 아니었기 때문인지, 내게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동무들을 찾아내기까지 내게 기억나는 거라곤, 썰렁한 콘크리트 주로와 그 위로 가득가득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뿐이었다.


1킬로미터가 지나기도 전에 나는 벌써 숨이 찼다.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 구간별 기록을 살펴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최대심박수에 가까웠다. 지금까지 달린 10킬로미터 중 가장 기록이 좋았지만, 내내 힘들게 달렸던 걸 생각하면 기록 몇 분 단축은 시답잖게 느껴진다.


그래도 한 가지는 좋았다. 꼴찌의 장점이랄까. 앞/뒤/옆 사람들과의 부대낌, 경쟁의식, 따라잡히는 것에 대한 은근한 피로감이 없었다. 나는 내내 대체로 따라잡기만 하면서 만족감 속에서 달렸다. 내가 특별히 뛰어나진 않지만, 최고를 목표로 하진 않지만, '나아질 일만 남았다'는 것은 굉장한 위로였다.


나는 나의 삶이 조금 생각나기도 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뒤는 없다는 긴장과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처참한 순간에 대해 아무래도 '좋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때때로 그마저도 긍정하는 마음이 가만히 생겨나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나는 '점점 나아지는 삶'이 익숙했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비관주의자이면서도 묘하게 낙관적인 면이 있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제쳐가면서 나보다 먼저 꼴찌로 출발한 남편을 만나길 바랐다. 하지만 남편은 나보다 먼저 반환점을 돌고, 끝내 먼저 피니시라인을 지났다. 나 때문에 달리기를 시작했고, 직장에 다니느라 나보다 3분의 1도 훈련하지 않았건만... 그렇지만 남편 역시 타인, 그는 그, 나는 나. 각자의 달리기를 할 뿐.


피니시라인에서 아직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기다린 남편과 완주메달과 간식을 받았다. 그리고 인증사진을 찍기 위해 마라톤 포스터가 붙은 가판대를 찾았다. 여기도 줄이... 허거덩. 하지만 나는 <주간 달려요정>을 쓰는 작가로서 인증샷을 남겨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이 가판대는 (배번호에 달린) 칩을 찍으면 개인 기록이 나오는 디지털 창이 더해진 것이었다. 꼭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줄은 여자화장실만큼이나 더디 줄었는데... '사진 한 장 찍겠다고 과연 이럴 일인가?' 냉철해진 것은, 이미 매몰비용이 상당해진 뒤였다.


게다가 줄줄이 이어진 사람들 앞에서 홀로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는 것은, 웬만한 담대함 혹은 무심함 아니면 관종스러움을 가지고서도 낯부끄러운 일인데, 기록까지 떡하니 공개되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기록이 좋은 쪽에 속한 사람은 좀 더 꼿꼿하고 여유로운 웃음을 흘렸고, 썩 좋지 않은 사람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서두르는 기색이 느껴졌는데, 그것은 순전히 내 주관적인 시선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거 상관없는데, 하는 마음과 별개로 나 역시 평소보다 주춤대고 서둘렀는지 (아니면 사진 찍는 남편이 그랬는지) 나중에 사진을 보니 영... 줄 선 보람이 없었다. 역시 매몰비용은, 따지는 게 아닌가 보다.


계획에 없던 시간을 쓴 탓에 허겁지겁 차로 가는데, 공원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대회요강에 보면 단체참가자들에게 따로 자리를 마련해준다는 문구가 있곤 하는데, 늘어선 천막 아래에 사람들이 어찌나 야무지고 단란하게 먹고 마시고 있던지! 각종 도시락이며 아이스박스에서 선뜻 나오는 술, 대체 언제, 누가 부쳤는지 모르겠는 전까지... 그들에게 달리기가 얼마나 주(主)였든지 간에, 아니 그것을 주와 부로 나누는 게 무의미 혹은 불가능할 만큼 '놀이'가 되었다는 것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검색해서 찾아간 대중목욕탕은 '사우나' 쪽에만 신경을 썼던 것인지(우리는 '목욕만 할게요' 하고 옷 없이 들어가서, 그쪽엔 가보지 못했다) 목욕탕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남편은 '충격'이란 문자를 보내놓고 약속시간보다 훨씬 일찍 나왔다. 잠깐이라도 탕에 몸을 담그고 싶었던 나는 '탕'조차 없어서 뜨악하긴 했지만, 한편으로 후딱 나와야 하는 아쉬움조차 없어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나는 낙관적인 비관주의자니까).

 

시동생네 식구들과 점심을 먹고, 잠깐 티타임을 가졌다. 아이들은 사촌들과 노느라 엄마아빠의 마라톤 참가에 별다른 관심도 한마디 불만도 없었다. 열두 시간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리는 뻐근하고 온통 피곤하고 졸음은 쏟아지지만, 정말 잘 놀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노는 거라면,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할 자신과 의향이 충만했다.




요약

마라톤 대회 장소엔 미리 도착하는 것이 좋다. (주차와 화장실 이슈가 있다.)

달리기는 여느 취미처럼, 그 자체가 목적이며 혼자 즐겨도 충분하지만, 그것을 매개로 놀이의 색깔과 범위와 종류가 마구 다양해진다.


30분 줄 서서 찍은 한 컷.


쨍한 하늘에, 강화 해변에, 마라톤 역사에 나만 아는 흔적을.


매일 달리기는 안 하는 게 아니라, 지금으로선 안 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9월의 달리기 총정리

산 것: 없음. (이제 가을 러닝복을 준비할 때가 왔다.)

부상: 없음.

몸의 변화: 몸무게 -0.5kg 정도(지금까지 총 1.5kg쯤 감량) 아주 느리게,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추세는 하향이라는 걸 느낀다. 그리고 확실히 군살이 줄었다. 한 번에 달리는 시간과 거리가 늘어난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게 아닐까 추정한다. (아, 주2회 요가와 짬 나는 대로 소소한 근력운동도 계속 하고 있다.)

일상의 변화: 화장과 치마에서 멀어졌다. 구두와 샌들, 슬리퍼도 거의 신지 않았다. 내가 원하고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편안함이 달라졌고, 나는 이게 더 나답다고 느낀다. 어딜 가든, 누구를 만나든 어떻게 함께 달려볼까 호시탐탐 엿본다.

읽은 책: <마라톤에서 지는 법> (완전 초보가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기까지 이야기. <심슨 가족>의 작가로서 특유의 '위트' 넘치는 문장이라는데... 나로선 좀 정신이 없어서 스캔하듯 정보만 취했다.)

총평: 달리기를 '취미'라고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나만의 방식으로 언제 어디서든 즐길 수 있고, 앞으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딱히 목표가 없어도 계속할 것 같다.



+) 참고가 되었던 영상


황영조 선수의 가르침 시리즈. 황영조라면 들어볼 만하고, 듣게 되지 않나. (살짝 선을 넘는 유머?와 꼰대스러운 어조에 거슬릴 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헷갈렸던 것들 몇 가지가 정리되어서 유익했다.


https://youtu.be/VJZdM9BcC8Y?si=FHCxhAD-OT999L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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