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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Jul 01. 2024

9주. 나만 아는 성취 (마라톤 3K)

나를 사로잡는 단순한 끝마침

지난 토요일, 처음으로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런데이 앱에서 개최하는 비대면 마라톤(현장 대회도 동시 진행). 이런 게 있네? 하고 신청할 즈음에는 3분 달리고 헉헉 대며 좌절하던 중이라, 제일 짧은 3K에 신청했었다. 지난주 천천히 달리기의 신세계를 경험하고는 5K로 할 걸 그랬나? 아쉬운 마음이 스쳤으나, 이내 정신을 차렸다. 자고로 실전은 도전이어서는 안 되니까. 훈련보다 쉬워야 어깨에 힘 빼고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 즐길 수도 있고.


이게 뭐라고, 한 주 동안 신경이 쓰였다. 그냥 내가 늘 달리던 곳에서 시작 시간(오전 8시)만 맞춰 달리는 것뿐인데 말이다. 건강검진과 요가원 스케줄, 이런저런 만남들, 날씨, 무릎과 몸 상태 등에 대해 평소보다 예민해졌다. 급기야 금요일 밤에는 풀리지 않은 피로와 '내일 늦게 일어나면 안 된다'는 긴장감 때문에, 가족들에게 요 며칠 중 가장 저기압의 기운을 내뿜기도 했다.


설마 마라톤 대회, 그것도 비대면, 그것도 고작 3킬로미터 달리는 것 때문에 그래? 라고 누군가 물었다면 나는 부정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토요일 아침, 맞춰놓은 알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깨서, 함께 뛰어주기로 했던 남편에게 무람없이 적대적으로 굴었으니 아무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대한 일을 앞두고 극도의 각성 상태에서 나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참회의 시간...)





내가 누릴 수 있는 성취의 양은 내가 정할 수 있다. 성취의 크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빈도가 더욱 중요하다. 이것이 내가 달리면서 얻은 소중한 진리다.
다른 스포츠 대회는 순위권 안에 들어온 선수에게만 메달을 주지만, 마라톤 대회는 완주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메달을 준다. 심지어 참가자 수만 명에게 메달을 목에 직접 걸어주기도 한다. 그만큼 '완주' 자체에 두는 의미가 크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달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략) 혼자서 고군분투한다는 느낌이 들 때 완주 메달은 내가 나에게 주는 칭찬이었다. 성취감과 자존감으로 단단히 무장한 내 마음가짐이 곧 나의 무기였다.

ㅡ안정은, <나는 오늘 모리셔스의 바닷가를 달린다>



달린 지 이제 두 달. 달리기가 왜 이렇게 좋은가, 왜 이렇게 달리기에 빠져들었나, 자문하면 솔직히 나도 좀 생각이 많아졌다. 굉장히 효율적인 운동이어서, 온몸을 움직이고 확실히 땀을 빼니까, 배우지 않아도 일단 가능한 운동이니까(악기로 치자면 '바이올린'이나 '색소폰'이 아니라 '마라카스'나 '북'처럼) 등등 여러 이유들을 댈 수 있었다. 모두 일리가 있었지만, 딱 이거다 싶진 않아서, '선사시대부터 이어져온 달리기의 유전자가 인간의 몸에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오히려 가장 그럴듯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마라톤 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하여 비록 3킬로미터지만 완주하고, 그러니까 평소 혼자 하는 달리기 운동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어떤 '의식'과 '인증'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더해져 또렷하고 확장된 상황이 되자, 알 것 같았다. 느껴졌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벅차게 하는지. 왜 또 달리고 싶어지는지.


오늘 달리기로 마음먹은 거리나 시간을 끝까지 달리는 것. 일어나 운동화를 신고 문 밖으로 나가서 단순하게 이룬 그 한 가지, 그렇게 하루하루 꾸준하게 쌓아가는 일은 사실 별게 아닐 수 있다. 나를 조금 건강하게 만든 것 말고는 딱히 결과물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 단순한 끝마침, 꾸준하게 하기로 한 일을 해내는 과정, 그 경험과 그때의 기분은 나를 사로잡는다. 아무도 모르게.


잘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보다 뛰어나지 않아도 된다. 어느 수준 이상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끝까지 하면, 된다. 그러면 성공이다. 누구나. 모두 다.


이렇게 하루를 살고, 한 해를 살아내고, 삶을 마무리하자는 생각까지 들어버렸다. 세상에 달리기의 신이 있다면 고맙다고 안아주고 싶다.




요약

달리기를 시작했다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보자. 대도시의 큰 대회, 풀코스 말고도 많다. 특히 비대면 마라톤 대회는 집 근처에서 비교적 쉬운 코스(3K 혹은 5K)를 비용 부담 없이 참가할 수 있어서 좋다.



기분이 끝내주네! 쿵! 치! 팍! 치! 쿵! 쿵! 치! 뽝! 치! 예~!


얼굴도 모르고 옷깃 한 번 스친 적 없지만, 함께 뛴 친구들에게 박수. 우리는 지금부터는 아주 친한 친구. 너와 내가 모르는 사이여도 달릴 수 있어~


런데이 앱의 초급 8주 훈련 말고도 할 수 있는 게 많아졌다. 재밌다.




6월의 달리기 총정리

산 것: 반바지, 스포츠브라(테무에서. 가성비 만족).

부상: 무릎 통증은 나아졌지만, 많이 달리면 신호가 온다. (대체로 무릎보호대를 하고, 하체 근력운동은 꾸준히)

몸의 변화: 몸무게 변화 없음(...당황하지 말자...). 몸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근육통에 거는 기대가 크다.

일상의 변화: 무기력과 우울감이 거의 사라졌다(15년 전부터 건강검진을 거의 매년 했는데, 문진의 우울 관련 항목들에 이토록 고민 없이 '전혀 아니다'를 체크한 것은 처음인 듯). 평상복이 달라졌다(언제든 달릴 수 있는, 혹은 달리고 나서의 복장으로). 짧은 반바지가 좋아졌다.

읽은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러너가 아니어도, 하루키 팬이 아니어도 읽을 만한 책), <달리기의 과학>(달리기 백과사전 같은 책, 한꺼번에 입력은 안 돼도 때때로 펼쳐보면 좋을 책), <마라톤 2년차>(일본에서 15년 전 나온 거라 정보의 효용은 덜하지만, 만화책의 장점은 그대로. 알고 보니 <마라톤 1년차>가 있었다. 읽을 예정), <나는 오늘 모리셔스의 바닷가를 달린다>(저자가 달리기로 할 만한 건 다 해본 젊은 여성으로, '러닝계의 연예인'이라고. 그런 사람에게 들을 수 있는 내용들)

총평: 천천히, 꾸준히, 길게 가자고 나를 진정시켜야 하는 게 원통하다. (진작, 더 어리고 건강할 때 시작할 걸..!)



+) 도움 되었던 영상들


1. 제목은 좀 어그로고, 천천히 달리기가 왜 중요한지, 얼마나 천천히 달려야 하는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준다. 달리기를 잘하기 위해 해야 하는 다른 운동들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이 영상을 보고, 내가 빨리 달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천천히 달려야겠다고 결정적으로 마음먹었다.

https://youtu.be/6t7cxfs8rK4?si=hEgi3ecROLhLkE21


2. 한여름을 앞두고 뭔가 대비하긴 해야겠다는 생각은 계속 들었다. 그래도 검색의 늪에 빠지기 싫어서 뻗대고 있었는데, 이 영상을 보고 감이 잡혔다.

https://youtu.be/biQ6zTRvHIM?si=IasJjR4qOTM-Rlqb


3. 준비운동의 중요성은 아는데, 은근히 귀찮다. 달리기 전 정적 스트레칭은 오히려 독이 된다고 해서, 조금 헤맸다. 이 짧은 영상을 보니 여기저기서 하라는 운동의 축약판이었다. 아주 유용하다.

https://youtu.be/p2NFYvHkRy8?si=B7lV2mXwyXTiCQ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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