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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Jul 09. 2024

10주. 가정이 있는 여자의 달리기

얼마나 미칠 것인가.

달리기를 시작한 지 이제 70일쯤 되었다. 그사이 남편과 두 번, 크게 싸웠다. 모두 첫 달에, 그러니까 내가 막 달리기에 빠져들던 때의 일이었다.


한 번은 런데이를 들으며 달리기를 하는 중에 첫째(13세)가 전화해서, 전화한 이유(동생들과 이런저런 갈등이 있었고, 막내가 엄마와 통화를 원한다)에 대해 미괄식으로 설명했다. 나는 알았고, 전화하지 말라고 했다. 문제는, 내가 무섭게 소리치면서 말했다는 것이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놀라서 흘깃거렸다. 물론 직전까지 나와 사이좋게 달리던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남편도 같이 달렸다. 길치인 내게 코스도 안내하고 운동도 하고 겸사겸사.) 나는 런데이가 중간에 멈춰서, 숨이 차오르고 몸이 달궈지며 흐름을 타던 내 달리기의 리듬이 끊겨서 몹시 못마땅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달리려는데 남편은, 왜 그렇게 전화를 받냐고, 아이한테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하냐고 연이어 나무랐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즉시 내 잘못을 깨달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변명과 반박의 여지도 없었다. 그러니... 빨리 달리기를 재개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만해!!!"


그날 달리기가 끝날 때까지 굳은 얼굴이던 남편은, 혼자 집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그렇게 달리기가 좋으면, 달리기만 해."


또 한 번은, 밤 달리기를 하려고 집안일을 서둘러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둘째(11세)가 "엄마아빠, 달리기 할 거야? 나도 같이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오늘은 늦었으니까 안 되고, 담에 같이 가자~"라고 하면서도 살짝 고민이 됐다. 둘째가 뭔가 먼저 하겠다고 나서는 일은 흔치 않으니까. 남편이 설거지를 하고 내가 빨래를 개는 동안, 옷을 갈아입는 내내 둘째는 졸랐다. 엄마아빠는 놀러가는 게 아니고 달리러 가는 거다("나도 달릴 거야~"), 생각보다 힘들 거다("나도 할 수 있어!"), 네가 못 따라와도 너를 기다릴 수 없는데, 밤이라 위험해서 안 된다("아냐, 할 수 있다니까?"). 결국 둘째는 울었다. 나는 내심 남편이 둘째에게 같이 가자고, 늦으면 아빠가 기다려주겠다고 말해주길 기대했다. 어디까지나 달리기의 주인공은 나니까. 제대로 달려야 하는 사람은 나니까.


예상 밖으로 남편은 둘째를 혼냈다. 나는 둘째를 달랜다고, 안 되는 이유와 앞으로 가능한 방법을 말했는데(T스럽게), 옆에서 듣던 첫째가 도움 안 되니까 그만하라고 했다(T답게). 나는 들켜서 당황했는지 느닷없이 언성을 높이며 첫째의 버릇없음을 혼내다, 기막혀하는 남편의 기운을 느꼈다. 서로 꿍 참고 나갔다가, 무릎보호대를 하네마네 엉뚱한 걸로 티격태격했고, 아파트 입구를 나서기도 전에 남편은 도로 들어갔다.





"이에 대해 부인은/남편은 뭐라고 하십니까?"


정치의 길에 들어서거나, 어떤 일에 반쯤 미친 사람에게 김어준이 종종 하는 질문이다. 그렇다. 그걸 알아야 한다. 그 질문에 대한 인터뷰이의 답을 들으면, 이 상황이 실제 어떤 상황인지, 그는 진짜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림이 그려진다.


자못 특별한 개인의 서사, 원초적 욕망이 녹아있는 꿈, 성원을 자아내는 대의 같은 것들은 어쩐지 헐겁고 나부낀다. 그것이 현실에서 어떤 모양새로 엉겨 있는지가 서사와 꿈과 대의에 형체와 질감과 무게를 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실의 중심엔 운명공동체의 얼굴이 있다. 그 얼굴에서 시름과 그늘, 혹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몇 겹이나 감싼 껍데기, 아니면 아예 텅 비워버린 구덩이를 알아채면, 나는 미스터리 사건을 대하듯이 아무것도 순수하게 믿어주지 않는다. 반대로 가장 가까운 사람의 따뜻한 무관심이나 잔소리 켜켜이 넣어둔 신뢰, 혹은 같이 형형해진 눈빛을 발견하면 안심이 되곤 한다.


하지만 운동은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운동은 삶의 양상을 통째로 바꾸는 정치나 사업과도 다르고,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탕진하는 데 비해 그로 인해 얻는 즐거움이나 실질적인 이득은 공유 불가능한 여타의 취미나 학업과도 다르지 않나. 건강이란 인간 모두의 필요이므로 운동하는 부모/배우자는 좋은 모델이 되고, 건강하고 활력 넘치는 부모/배우자로서 실제로 해줄 수 있는 게 많아질 뿐 아니라, 노후에 부양의 부담도 덜어주니까.


간혹 배우자의 눈치를 보며 운동하러 나간다거나 지지 대신 허락을 받으며 운동한다는 이야기, 운동하는 것에 대해 가족들에게 응원과 자랑스러움이 아니라 무관심 혹은 냉소의 반응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의아했다.


왜 좋은 게 좋기만 하지 않지?


물론 나의 경우는 조급한 게 문제였다. 달리다 잠깐 통화를 하고, 아이랑 놀며 천천히 달려서 어쩌다 훈련이 흐트러진다고 대세에 영향을 주지 않으니까(그리고 대세에 영향을 준다 해도, 기꺼이 통화하고 기꺼이 함께 달렸어야 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그래도 그때는 꽤나 억울했다. 나의 이 건전하고도 훌륭한, 진지하고도 황홀한 달리기 여정에 불쾌한 기억이 묻어서. 이렇게나 좋은데, 좋기만 해도 될 것 같은데, 달리기를 떠올릴 때마다 위의 일들이 기어코 흉터처럼 고개를 내밀 것이었다. 나는 주렁주렁 달린 아이들과 내 맘 같지 않은 남편이 야속하기만 했다.


어쨌거나 무릎 부상으로 달리기 여정에 급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내 열정의 열기와 몰입의 속도도 얼떨결에 조정됐다. (무릎 부상은 여러 가지로, '불운의 형태를 띤 행운'이 아니었나 싶다.)



살면서 무언가에 몰입했던 순간보다 강렬한 기억은 거의 없다. 몰입의 순간은 인생을 살 만하다고 느끼게 한다.  /29-30쪽

몰입 경험은 기본적으로 다시 한 번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문제를 이겨내는 능력을 키운다. 몰입의 기억은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수많은 난관을 이겨내야 하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다시 도전하고 큰 문제도 해결해보려고 덤비게 한다.  /134-135쪽

ㅡ미하이 칙센트 미하이 외, <달리기, 몰입의 즐거움>



실로 오랜만에 달리기를 하면서 살 만하다고 느꼈다. 게다가 지속 가능할 뿐 아니라 성장 가능한 일이어서, 마음껏 몰입해도 된다고 여겼다. 나는 책을 읽고 영상을 찾아보며 달리기 공부를 하고, 잘 달릴 수 있는 몸을 위해 근력 운동과 요가를 했다. 달리기도 성실하게 했다.


무릎은 점점 나아지고, 달리기는 착착 늘었다. 마라톤 경기(3킬로미터)를 해보니 이건 또 너무 재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더 많이, 더 잘 달리고 싶어졌다. 필요한 물건을 알아보고 살금살금 사들이고, 마라톤 경기마다 살피며 신청을 적극적으로 고민했다. 요 며칠 나는, 확실히 '덤비고' 있었다.


지금 달리러 나가자고, 마라톤 경기에 신청하자고(아니면 나는 할 테니 아이들을 맡아달라고) 남편에게 요구하는 일이 많아졌다. 뜨악해하고 난감해하는 남편의 얼굴을 자주 본다. 나는 어디까지 나 혼자, 내 맘대로 해도 괜찮은가 고민하다 갑갑해진다.


내가 지금 미치고 있구나 깨닫는다. 얼마나 미쳐도 될까? 적당히와 정도껏은 대체 얼마큼일까? 나는 내 재미와 욕망에 휩쓸려 나날이 덩실덩실 즐거운데, 옆에서 휘말려버린 남편과 아이들은 과연 어떨까? 아직, 이것을 생각할 만큼 남아있는 나의 소중한 제정신에 경의를 표(하며 무언가 구체적인 개선안을 내야 하겠지만, 아무 생각이 안 나므로, 일단 이쯤에서 만족하기로)한다.




요약

뭐든 너무 재미있으면 빠져버리고, 그러면 가족은 타격을 입는다. 안타깝게도 달리기도 그런 것 같다. 아직 해결방안은 찾지 못했다. (찾기 위해서는 좀 더 미쳐 있어야..)



요즘 달리기가 뜸했던 남편은, 걷기 없이 달리고 나서 뻗었다. 나 덕분에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나 때문에 힘들어질까?


이제 걷기 없이 쭉 달린다. 언제 매일 달리기를 해도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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