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진짜 나'에 대해 나는 할 말이 없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인들은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다.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수리한 배에서 다시 다른 판자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에는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플루타르코스
처음 '테세우스의 배'에 대하여 듣자마자 이건 정말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했다.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우는 거야 상관없는데... 다 갈아 끼웠다면? 테세우스가 탔던 배의 판자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면? 이 배를 과연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나?
더 나아가, 어떤 철학자는 이런 질문을 보탠다. 갈아 끼우느라 버려진 썩은 판자들로 또 다른 배를 만들었다면? 이 배가 더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이런 이야기를 덧붙인다. 사람의 몸은 거의 모든 세포가 일정한 주기로 교체되는데(주기는 수명의 평균을 세포수로 잡느냐 질량으로 잡느냐에 따라 다르고, 당연히 사람마다도 다르지만: "우리 몸은 1초에 380만 개의 세포를 교체한다"), 그럼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
얼핏 생각하면, 혹은 조금 깊이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나는 그랬다. 이를 소재로 호러물을 구상했을 만큼. 어쨌든, 마음의 안정을 주는 사실은 '뇌신경세포는 교체되지 않는다'는 것.
6년 전 이맘때 처음으로 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아 먹었다. 이런저런 사안들이 얽혀 있었겠지만 어쨌든 가장 말끔하게는 '육아우울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6개월쯤 약을 먹었다. 어떤 증상은 거의 먹자마자 나았고, 어떤 상태는 아주 서서히 괜찮아졌다. 총체적으로 '이제 진짜 나로 돌아온 것 같다'는 인식은 1-2년 전쯤에야 생겨났다.
그건 굉장히 반가운 일이었다. 그래, 정말 반가웠다. 내가 나를 꽤나 좋아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문제는, 아니 '문제'라고 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전의 삶들이 '전생 같아졌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표현엔 얼마간의 과장이 있지만, 나로서는 그 이상의 표현이 없다. 기억 자체도 흐릿했지만, 지난날의 일들에 대해서 '나의 일'이었다는 감각, 그 일들의 주인공이 '나'라는 감각이 옅어졌다. 그게 나의 일이었나? 어디서 읽었나? 실제 있었던 일이었던가? 아니면 생각만 했던 일? 아니면 꿈?
누구에게나 있을 법하게, 출산의 충격과 노화가 원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로서는, 몇 년간 턱없이 부족했던 수면의 양, 그나마도 저질의 수면(그중 몇 개월은 심각했다)을 골자로 하는 육아집중기와 육아우울증의 시절을 지나, 정신과 약을 기점으로 회복되면서 정신을 차려보니, 그야말로 깊은 잠을 자고 깨어난 것처럼, 다시 태어난 것처럼, 다른 세상에 와 있었고 다른 날이 열려 있었다. 그것을 인지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지만.
가만히 지난날을 돌아보았다기보다 문득문득 놀랐다. 그 일이, 그 웃겼던, 그 황홀했던, 그 끔찍했던 에피소드가 첫째의 것이었나, 둘째 혹은 셋째의 것이었나, 그러니까 심지어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갈 만큼 인생의) 가장 강렬했던, 직전의 기억마저 헷갈렸다.
그리고 어떤 일은 깡그리 잊었다. 얼마나 별일이었나는 상관이 없었다. 인생에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그에 관한 기록(일기 혹은 메신저에 저장된 대화)을 보고서야 느닷없이 기억나기도 했다. 마치 그날 새벽의 생생한 꿈이 오후쯤 불현듯 떠오르는 것처럼. 가까스로 기억을 건져올려야 맥락이 이어졌다. 그나마도 모래사장에 게가 지나간 자리처럼 안쓰러운 흔적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사람의 기억이 이렇게까지 될 수 있다는 게 실로 충격이었는데, 그 역시 별스럽지 않은 일이 되었다. 누구나 기억력은 감퇴하는 거고 나 역시 바야흐로 40대 중반으로 향하고 있으니까.
이런 일들은 대체로 서글픈 색이었다. 뭐랄까, 내가 열심히 그린 그림이 비도 맞고 바람도 맞고 그래서 흐리고 바래진 그런 색. 그런데 어느 순간, 아주 새 종이는 아니어도, 이 가물가물한 바탕에 새로 그림을 그리면 되겠다 싶은 것이었다.
나의 외작은할아버지는 작명가였다고 한다. 초등학생 때 할 일 없이 집에서 뒹굴다가 장롱 깊숙한 곳에서 어떤 상자를 발견했다. 거기엔 우리 세 자매의 아기수첩과 탯줄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는데, 누런 봉투에 한자로 내 이름이 적힌 편지도 있었다. 내용도 한자로 가득했다. 몇몇 숫자도 있었다.
이후로 때때로 들추어 보았는데(한자를 조금 알게 된 후라든가, 심심할 때라든가), 대강 추측해보건대, 내 이름의 뜻은 이러저러하고 이 나이에 어떤 일이 있을 거라는,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그간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내 사주가 꽤 괜찮으며 작은할아버지께서 그에 걸맞게 내 이름을 잘 지어주셨다고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런 것을 전혀 믿지 않을뿐더러 무시하고 배척해야 한다고 여겼음에도(우울증 이후로 생각이 달라졌다), 왠지 기분이 좋았고 든든했다. 아주아주 불행했을 때도 모래사장의 게의 흔적처럼 잊지 않고 붙잡아두었다.
그런데... 저런. 학창시절 언젠가 등본을 제대로 보고 알게 되었다. 내 이름 중 한자 하나가 잘못 기재되었다는 걸. 아주 사소한 차이였다. 변에 획이 두 개 더해진, 워낙 복잡한 한자라 티도 잘 안 나는. 그렇지만 김이 새는 일이었다. 원래 내 이름을 풀면 '넉넉함에 이르다'란 뜻인데, 뜻풀이가 되지 않는 이름이 되어버렸으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쩔 것인가. 이미 내 이름은 국가적으로, 공문서에 그리 적힌 걸. 어디 가서 바꿔달라고 해야 하는지, 바꿔달라 하면 바꿔주기는 하는지 알지도 못했다. 한자 이름을 쓰는 일도 별로 없고... 묘하게 불쾌하고 마음이 불편했지만 상관없다는 듯 살아왔다.
그러니까 요 며칠 전까지 말이다.
나는 내 인생에 그림 하나를 새로 그리기로 하면서 오랜만에 한자 이름이 필요했다. 공적인 문서에 틀린 한자 이름을 적어 넣으면서, '싫다'는 단호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원래의 내 이름대로 적고, 개명 신청을 하기로 했다.
공동인증서를 몇 년 만에 받고, 정부24와 전자가족관계등록시스템에서 각종 서류를 떼고, 전자소송포털에 요구하는 내용을 쓰고 서류를 첨부하고, 3만 원쯤의 소송비용을 냈다. 이 모든 걸 맥북으로(!), 친절하고 세심한 블로거들의 안내를 참고하여, 혼자서, 띄엄띄엄 몇 시간을 들여 완료했다. (결정까지는 두세 달을 기다려야 한단다.)
어쩜 이럴 수 있을까 싶게 후련하다. 이름이 대체 '진짜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냐만, 나는 흐릿해지고 바래진 내 삶 위에 한 줄기 붓질을 힘차게 한 기분이다.
암호 같은 편지를 열어보고 아무것도 풀지 못한 채 다시 덮어놓으면서 흐뭇할 수 있었던 것처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진짜 나'인가 묻지 않고도, 답하지 못해도, 언제든 '새로운 나'로 가뿐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차피 '진짜 나'에 대해 나는 할 말이 없다. 이 배가 테세우스의 배인지 아닌지, 테세우스가 따질 일이 없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