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그냥 민망할 정도로 콧물까지 줄줄줄...
한동안은 그렇게 결혼식만 가면 눈물이 났다.
아마 처음은, 동아리 선배 커플의 결혼식이었을 것이다. 내 눈엔 그런 천생연분이 없었는데, 집안의 반대가 극렬해서(남자 선배가 곧 목사가 될 예정...) 몇 년을 기다렸다 마침내 결혼했다.
남들 몰래 눈물을 닦아대면서, 나도 내가 이상했다. 정말 좋아하고 진심으로 존경하는 선배들이 그간 했던 마음고생에 대한 연민이었는지, 결국 결실을 맺은 데 대한 감동이었는지, 앞으로 잘 살길 바라는 기원이었는지, 아니면 그때 옆에 앉은 남자친구와의 결혼을 떠올린 주책이었는지,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가 20대 중반이었을 텐데, 그로부터 한 10년쯤은 결혼식에 갈 때마다 그러고 다녔다. 진짜 왜 그랬을까?
아니, 어쩌면 더 이상 안 울게 되었던 이유가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언젠가부터 눈물이 나지 않았다. 더 이상, 조명과 생화와 의상과 메이컵의 부스트를 받은 주인공들의 아름다움도, 서로를 향한 눈빛의 이성적 허용선을 넘은 달달함도, 사랑의 결실이든 함께하는 삶의 시작이든 그 의미의 거룩함도, 닳고 닳은 주례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 한구석 들을 만했던 현실의 지혜도, 아무런 울림을 주지 않았다.
다음 눈물버튼에 대해 쓰기 전에, 내가 보통 언제 우는가에 대해 적어보겠다.
나는 눈앞의 사람 때문에 우는 일이 극히 드물다. 상대방 때문에 화가 났다거나 무안했다거나 억울하다거나 속이 상해서 우는 일이 평생 다섯 번 있을까 말까... 엄마아빠에게 혼나거나 맞았을 때도 아주 어릴 때 말고는 울지 않았다. 언니동생 혹은 친구랑 싸울 때는 물론이고, 선생님에게 혼나서 운 적도 없다. 상사 때문에 운 적은 딱 한 번.
'적'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운 적도 거의 없다. 그러니까 앞의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의 상황에 공감이 돼서 우는 일 같은 것. 그게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정나미가 떨어질 때도 있었는데, 억지로 우는 것은 더 극혐이기 때문에 관두기로 했다.
그렇다고 내가 눈물이 없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책을 보고 나름대로 꽤 많이 울어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기도할 때 많이 울기 때문이었다. 내 눈물의 9할은 기도할 때 흘렸다. 신 앞에서 아주 진실하고 진지해지다 보면 겸손해지고 마는데, 결국 눈물이 나오고야 만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눈물버튼'이라고 셈에 넣진 않는다. 왜냐면 우는 과정과 맥락에 대해 인지하고 우는 거니까. 갑자기 버튼이 눌린 것처럼 눈물이 핑 돌거나 줄줄 흘리는 것이, 울고 나서야 왜 울었는지 스스로를 이해해보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다음 버튼은 3년 전쯤 처음 알게 되었다.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던 무렵, 입교하고 세례를 받느라 뭔가 찾아보다 '사제 서품식' 사진을 보았다. 그러니까 실제로 본 것도 아니고 사진으로 본 장면인데, 한창 젊은 청년들이 수트에 하얀 옷(로만칼라가 달린 수단과 제의), 거기다 구두까지 신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손을 대고 있지만 얼굴을 땅바닥으로 향하고 그렇게 엎드린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또 실제적으로 완전히 '무력'한 자세였고, 그 어떤 '위엄'도 포기한 모습이었다.
그들이 내린 결정, 앞으로 자신을 위한 삶을 내려놓고 '내 것'이라고 할 만한 소유와 (하느님을 제외하고) 기댈 만한 모든 것들을 놓아버리기로 한 그 결정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도 그랬겠지만 이후의 과정은 또 얼마나 어려울지 이제 나는 아는 나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나의 어떤 자아가 무너져서 납작 엎드러졌다.
마지막 눈물버튼은 지난해 5월 미사를 드릴 때 발견했다. 어버이날이 있던 주일이었는데, 미사 마지막 파송 성가를 부르는 때에 (성가 몇 번인지 나와야 할) 화면에 '어머니의 마음/어버이 은혜'가 떴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사.
낳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그지없어라
사람의 마음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녀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친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오리
어머님의 사랑은 지극하여라
실로 오랜만에 불러보는 노래였다. 초등학교 때가 마지막이었을 테니, 30여 년 만. 어릴 때 배우고 부른 노래라, 적힌 가사를 보며 노래를 부르는 일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다만 눈물이 줄줄줄...
어릴 때에도 멜로디의 절절함과 가사가 그리는 과장된 듯한 상황들 때문에 뭔가 처연한 정서를 느꼈었다. 하지만 마흔이 넘어, 아이 셋을 기르느라 저 밑바닥에서 허우적대다 살아나 이 노래를 다시 부르니, 이건 완전, 그야말로... 진짜였던 것이다.
지금 엄마 얼굴도 떠오르고, 그때 엄마 얼굴도 떠오르고, 딸이었던 나도 떠오르고, 엄마가 된 나도 떠오르고, 정신없이 지지고 볶고 하던 때도 떠오르고, 그때 아기나 다름없던 아이들도 떠오르고, 나중에 나만큼 커서 나를 떠올릴 아이들도 떠오르고... 해서 아주 그냥 민망할 정도로 콧물까지 줄줄줄...
역시 명작은 시간에 허물어지지 않는다. 이 노래를 배워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스승의 은혜'나 이런 노래를 배울 때는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것'조차 강제로 주입되는 것 같아 반감이 일었었는데.
5월엔, 내 생일도 있고 결혼기념일도 있는데... 어버이날의 지분이 갈수록 커진다. 이 노래도 한몫 거든다.
지난 토요일 오랜만에 결혼식에 다녀왔다.
대학 졸업 즈음부터 한참 재미있게, 그러다 조금은 질린다 싶게 (눈물을 뿌리며) 결혼식이라는 행사에 다녔었다. 또래의 결혼 적령기가 얼추 끝나고 또 코로나 팬데믹이 겹치면서, 결혼식은 연중행사 정도가 되었다. 그나마도 예전엔 남편이 받은 초대도, 내가 받은 초대도 무조건 함께 갔는데, 이제는 둘 모두에게 해당되는 경우에도 대표로 한 사람이 가는 일이 많았다. 둘이서 아이들을 다 데리고 가느니, 한 사람이 혼자 혹은 한 명쯤 데리고 참석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
이번에도 그럴까 하다, 첫째와 둘째가 자기들끼리 마라탕 먹겠다고 해서 그리하라 하고, 막내와 남편과 셋이 결혼식에 갔다. 푹푹 찌는 날,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타고 셔틀버스도 타고 서울 한복판으로. 하지만 오랜만의 잘 짜인 예식을 보는 것이 왠지 즐거웠다. 그 모든 것이 반갑게도 여겨졌다.
홈쇼핑 호스트가 사회를 보고, 주례도 없이 신부의 아버지가 주례사 비슷한 말씀을 해주시고, 연예인들의 축하 영상을 보고(주인공들이 엔터계에 종사)... 이래저래 낯설다고 느끼면서도,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들도 있었다. 조명과 생화와 의상과 메이컵의 부스트를 받은 주인공들의 아름다움, 서로를 향한 눈빛의 이성적 허용선을 넘은 달달함, 사랑의 결실이든 함께하는 삶의 시작이든 그 의미의 거룩함, 뻔할 것 같은 주례사지만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 한구석 들을 만한 현실의 지혜... 그 모든 것들이, 다시 마음을 울렸다.
그래서 또 살짝, 울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