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는 없었지만 나의 문제였구나,
차를 몰고 벼랑길을 오르고 있었다. 나는 더없이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것은 운전 자체에 대한 것이기보다 모든 것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을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저 충만하다 못해 넘쳤다. '오만하다'는 느낌이기보다 '나 자신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 길은 좁고, 바로 옆은 낭떠러지이고,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오르막길 중에 있어도 나는 사실 아무렇지 않았고, 거침이 없었다. 할 만했고 쉬웠다.
그런데 차의 움직임이 내 예상과 어긋났다. 이만큼 핸들을 꺾으면 이만큼 휘어야 하는데, 더 휘거나 덜 휘거나 했다. 엑셀을 이 정도 밟으면 속도가 이 정도 나야 하는데, 더 빠르거나 더 느렸다.
나는 당황했고, 위험천만한 길이 그제야 인식됐고, 그러자 긴장했다. 이제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고 뚫어질 것처럼 전방을 주시하고 온 정신을 집중하는데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점점 더 당황했다. 눈을 치켜뜬 나는 작아져 있었다. 불안했고 공포에 떨었다.
2주 전쯤 이런 꿈을 꾸었다. 그날은 면접을 보러 가는 날이었다. 너무 긴장해서 이런 꿈을 꾼 게 아니라, 그 반대였다. 그러니까 꿈의 내용은, 그것이 뜻하는 바는, 굳이 상징을 풀이하고 해석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무색할 정도로 뜨끔했다.
때로 모든 것이 명료하게 느껴진다. 내 머릿속도, 그리고 내가 마주하는 상황도. 자체가 빤히 다 보이고, 그 뒤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일어날 일들도 다 알겠는 그런 느낌. 이에 대해 내가 어떤 힘을 가하면(작용) 그에 대한 반응(반작용)이 내 예상과 들어맞아서 점점 더 확실해지는 상태.
그럼 나는 의기양양해진다. 내 안의 기운이 스스럼없이 밖으로 뻗친다. 그게 또 연료가 되어 더 득의양양해지고 그러다 보면 기고만장, 결국 오만방자에 이른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느냐? 시간문제다. 내 상황 판단이 틀리든, 내 태도가 도를 넘든, 반작용이 영 예상과 다르게 나타난다. 나는 당황한다. 놀라고 의아해하다가, 움츠러들고 숨어서, 슬프고 부끄러워서 죽을 것같이 괴로워한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한없이 실망하고, 인간 존재에 실컷 냉소하고, 세상과 삶에 주었던 마음을 되는 대로 거둬들이다 보면 모든 것이 어두컴컴해지고 울적해진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진다.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니 그래선 안 될 것 같다. 뭘 해도 잘못될 것 같으니까, 망가뜨릴 것만 같으니까.
뭘 해도 잘 될 것 같다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짧게는 하루 안에도 여러 번, 대략 해마다, 길게 보면 십 년 단위로 일어난다. 우스운 일이다. (이유는 알 때도 있고 모를 때도 있지만 내가 확실히 느끼는) 나의 감정 기복부터 (게임처럼 예상대로 되어갈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 일상의 부침, 그리고 (거의 운이라 여겨져서 두 손을 들어버린) 운명의 수레바퀴까지, 어릴 때부터 어렴풋이 알아챘으면서도 아직까지 헤맨다.
여름은 오래도록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그런데 1-2년 전부터, 그러니까 내 인생의 여름이 확실히 지나버린 때부터 여름이 조금 달리 보인다.
봄의 생동하는 기운을 인지한 것은 좀 더 되었다. 이제는 봄이 다가오면 몸이 노래를 부르는 것마냥 설렌다. 연둣빛이 그지없이 어여쁘다. 그런데 여름이 진해지면서 같이 진해지는 초록은, 한여름 한낮의 생초록은 부담스럽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감당하기 어렵다, 감당하기 싫다, 하는.
여름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 악의 없이 자신의 기운을 뻗치는 것뿐인데, 그 기운에 어떤 존재는 한 걸음 물러서 그 기운이 닿지 않는 곳으로 피하고 싶어진다. 물론 어떤 존재는 그 기운을 먹고 같이 무럭무럭 자라는데, 그런 것엔 열매 같은 것도 있고 벌레 같은 것도 있어서, 고맙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나는 한 번도 그렇게 본 적 없는 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아, 이렇게 내가 어떤 사람을 불편하게 했구나, 깨닫는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놀라고, 불쾌해하고, 피했었는데, 그게 의아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는데, 억울할 때도 있었는데, 악의는 없었지만 나의 문제였구나 하는.
마구 자라버린 가지와 잎을, 가을이 와서 자연스레 떨구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터도 있겠지만, 어느 곳에선 전기톱을 들어 내쳐야 하고, 그 안에 깃들인 작은 생명체들에도 약을 쳐서 치워버려야 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편향과 오류와 편견에 관한 불길한 사실이 있다. 바로 미스터 B에게 그의 망상이 보이듯이 우리에게도 우리의 편향과 오류와 편견이 진실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남들은 다 '편견'에 치우치고 우리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처럼 느낀다.
ㅡ윌 스토, <이야기의 탄생> 91쪽
스물한 살에 영화 <뷰티풀 마인드>를 보고 그때까지는 전무하게 감동했었다. 그 이유를 지금에 와서 다 가려낼 수는 없겠는데, 이런 생각도 든다. 아주 똑똑한 머리로, 모든 패턴이 보였던 존 내쉬에게, 자기에게 뚜렷한 것이, 그 모든 패턴이 틀렸거나 무의미하거나 심지어 허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까.
그러니까 존 내쉬나 미스터 B(<트루먼 쇼>의 트루먼처럼 자신의 일상이 카메라로 찍혀 방송된다고 믿는데, 트루먼은 그게 사실이었지만 미스터 B는 아니다)처럼 '공식적으로' 정신질환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각자의 신념에 바탕한 각자의 세상을 산다. 이 신념은 편향과 오류와 편견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그걸 모른다. 그뿐 아니라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엔 이런 인간들뿐이니 부딪힐 수밖에. 부딪히는 순간은 당황스럽고, 그런 부딪힘이 일상인 삶은 껄끄럽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신념을 공유한 사람들끼리만 지내고, 어떤 사람은 어떤 '신념'도 없는 양 이리저리 묻어 지낸다.
타고나기를 그런 안전하고 편안한 노선과는 거리가 멀고, 걸핏하면 망나니같이 기운을 뻗치고 모난 돌처럼 삐죽하니 나와 정을 맞는 입장에 처한다. 그것은 결코 유쾌한 적 없는, 민망의 바닥과 천장을 골고루 치는 아주 골때리는 경험이지만, 어쩌면 그 덕에 결과적으로는 '조정'의 기회를 얻으며 산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스스로에게조차 부끄러운 꿈이었지만, 용케 그런 꿈을 꾸었다는 생각이 든다. 꿈으로라도 마주쳤어야 할 때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