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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Nov 03. 2020

사랑과 인정, 새옹지마

나 역시 이것으로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대학 때 사이코드라마를 배우면서 주인공이 되거나 보조자아 혹은 디렉터로 참여한 것이 100회가 넘는다. 많은 이야기들, 특히 내면에 꽁꽁 숨겨둔 이야기들을 만나면서 어느 순간 한 가지가 보였는데, 모든 이야기가 결국 두 가지 중 하나라는 점이었다. 사랑받고 싶은데(싶었는데) / 인정받고 싶은데(싶었는데) 그것이 좌절돼 슬프고 화가 난다 혹은 그러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
인간의 욕구가 ‘결국’ 사랑과 인정이라는 것은 스무 살 무렵의 내게 엄청난 깨달음이었고, 다른 모든 것은 까먹었지만, 그것만은 내게 각인되어 남았다.
 
첫째ㅡ남편ㅡ둘째ㅡ나ㅡ셋째. 방 하나에 퀸과 슈퍼싱글 침대를 붙여놓고 이 순서로 잔다. (좁고 답답하다고 남편은 종종 거실로 탈출... 하지만 실은 난민 신세) 여기에 쓰인 글자의 배열은 나란히 정갈하지만, 시작부터 엉망이다. 첫째가 오늘은 나도 엄마랑 자고 싶다고 호소하는 통에 온 가족이 한참을 씨름하기 때문이다.
내 몸에 앞뒤로 찰싹 붙어 잠든 둘째와 셋째를 조심스레 떼어놓고 아직 잠들지 않은 첫째를 재우기 위해 남편과 자리를 바꿔 눕는다. 용케 같이 잠들지 않고 홀로 하루의 끝을 맞이하는 날이면, 나른하고 달콤한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넘치도록 사랑받는 내 삶에 대해서. 그리고 인정받지 못하는 내 삶에 대해서.
 
이 사태는 바랐던 것이 아니고 예상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낯설기까지 하다. 거칠게 이야기해서, 사랑은 내 능력과 의지 밖의 일이고 인정은 그렇지 않기에, 인정을 나의 일로 삼아 살아왔기 때문이다. 혹은 태어나 봤더니 사랑보다는 인정을 받기 쉬운 여건이었기 때문에 하염없이 그쪽 품으로 파고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마흔을 코앞에 두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 하나 없이, 때로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 풍족한 삶은, 내게 웃기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일이다. 물론 감사한 일이기도 하고.
 
인생이 무언가를 이루거나 남기는 일이 아니고 경험하고 배우는 과정이라면(나는 점점 그렇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에게는 이 시간이 필요했던 것 아닐까.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를 드러내고 내가 계획하고 노력해서 성취하는 삶이 아니라, 나를 내어주고 함께하고 기다리고 받아들여야 하는 삶. 내게 있는지도 몰랐던 사랑을, 때로는 쥐어짜서, 때로는 끝없이 흘러나오는 대로, 알맞게 주는 일을 나는 계속 배우고 연습한다.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것들, 익숙한 방식들은 거의 쓸모가 없어서(심지어 독이 되어서) 버리고 또 버리면서.
 
사랑과 인정이 무 자르듯이 똑 나눠지는 것이 아니고 물고 물리고 얽히고설킨 일이라, 인간이 어느 하나만 바라고, 삶이 어느 하나로만 채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이것으로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캄캄한 밤 허공을 바라보면서 ‘참, 인생이란 얼마나 예상을 벗어나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인지!’ 하고 감탄하고 감사해하면서도,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인정받을 것인가?’를 사족처럼 궁리하고야 만다.
 




끝내 해내지 못한 공부와 어느 정도를 넘지 못한 경력과 새로 시작하기에도 늦었다고 포기하기에도 애매한 나이와 빠듯한 살림살이와 어린아이 셋을 키워야 하는 여건을 곱씹다 보면 결국엔 우울해지는데, 요즘 한 가수를 보고 다른 마음을 갖게 됐다. 그는 데뷔한 지 30여 년 만에 드디어 빛을 본 정도가 아니라 신드롬이라 할 만큼 인기몰이를 하는 중이다.

젊은 시절 그가 모든 걸 쏟아부어 노력할 때 ‘실패’할 줄 알았을까? 그리고 30여 년이 흐른 후에 이렇게 ‘성공’할 줄 알았을까? 그걸 모르면서 그 당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30여 년 동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결과가 있지 않았다면 그가 한 같은 일들은 어떤 의미일까? 혹은 모차르트나 고흐처럼 30년이 아니라 사후에 인정받는다면?
 
그는 아무것도 계산하고 행동하지 않았을 테고, ‘실질적으로’ 계산하고 행동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처럼. 그는 다만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고, 그에 대해 자신이 받아든 결과에 좌절해서 삶을 내던지거나 남을 원망하거나 자신을 괴롭히는 대신 하루하루 또 최선을 다해 살았다. 정말 우연히도 그리고 다행이게도 다시 무대에 서서 자신이 가진 것을 펼칠 수 있는 때에 그는 불려왔는데, 그게 아니라 훨씬 나중에, 혹은 사후에 인정받고 성공한다 해도, 그가 당시에 할 수 있는 일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세상 끝날까지 빛을 보지 못한다 해도 마찬가지고. 그가 받아든 지금의 ‘성공’, ‘축복’은 확실히 보장된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일어난, 혹은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또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새옹지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처음 이 고사성어의 유래를 들었을 때 ‘교훈적으로’ 만들기 위해 작위적으로 잘도 짜맞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어떤 나쁜 사건이 나중엔 좋은 일이 되고, 그 좋은 일이 나중에 나쁜 일이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이 이야기가 점점 내 가슴속에 뿌리를 내린다. 내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결코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다. 명백히 성공적인 상황도, 누가 봐도 불행한 상황도.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그런 면도 있지만) 그 일 자체가 정말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그 순간에 알 수 없고, 그에 대한 최종판단을 언제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너무나 흥미롭고 너무나 무서운 이야기다.
그 가수의 경우, 데뷔 당시에는 여러 가지로 처참한 결과를 받아들었지만, 바로 그랬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 되었다. 그럼 그때의 삶이 좋은 것이었고 심지어 바라마지 않을 상황인가?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바란다고 나중에 생각대로, 계획대로, 바람대로 될 일인가? 그리고 지금 일어나는 일이 또 나중엔 어떻게 해석될 줄 알고?
 
또 한 가지. 사실 이 사건은 그의 청년 시절의 노력이 이제 와서 인정받는 일로 해프닝 같이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살아왔던 과정, 현재의 모습 때문에 그야말로 폭발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렇게 빛을 볼 줄 알고 그가 힘든 상황에서도 성실하게 살았던 게 아니다. 또한 이렇게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삶이 비로소 의미 있어진 것도 아니다. 훗날의 결과를 예상하고 계산해서 현재를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는, 캄캄한 밤 허공을 바라보면서 어깨를 으쓱한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야. 좌절할 것도 기고만장할 것도 없어.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야, 겸손한 자세로.
마침내 
눈을 감고 숨을 내쉰다. 그 노력의 결과 역시 내 것이 아니야. 그게 무엇이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달라지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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