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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Oct 30. 2020

어떻게 잘 사랑할 것인가?

친절함에 대하여


 
 
어릴 때부터 아이 네 명을 낳는 게 꿈이었던 나는(첫 출산 후 바로 접음), 서른하나에 첫 아이를 낳고 30대는 육아에 전념하겠다고 다짐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앞에 자아를 가진 생명체 셋이 있고 나는 서른아홉이 되었다. 서른몇이라고 내 나이를 세어보지도 못하고 30대가 통째로 사라져버린 느낌에 요즘 흠칫 놀라는 걸 보면, 그 소용돌이에서 어느 정도 빠져나왔다고 할 수 있겠다.
 
그사이 내가 제일 많이 했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아이를 잘 사랑할까?’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삶의 중심이 완전히 아이에게로 옮겨졌다. 나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 육아서를 탐독하고 육아선배에게 질문을 퍼붓고 인터넷을 뒤지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잘 키우는 것인지 공부하고 실행하려고 노력했다.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이 확실히 있고, 그것을 알 수 있고, 그대로 할 수 있을 것처럼.
 

그런데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 있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주 좋은 재료로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음식을 한다. 그런데 아이가 잘 먹지 않는다. 어떻게든 먹이기 위해 씨름을 한다. 좋은 음식을 든든히 먹이는 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처럼.


유난히 까다로운 첫째 때문에, 요리 자신감도 바닥을 치고, 울 것 같은 얼굴로 오늘은 무슨 음식을 해서 먹이나 고민하고, 한 끼 먹이는 게 그날의 미션인 것처럼 살던 때가 있었다. 남편은 그러면 내가 아이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는 것보다 내가 기분 좋은 상태인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아이가 잘 먹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좋은 기분일 수 있냐고 화를 냈다. 아이가 잘 먹어야만 내 기분이 좋을 수 있는 것은 왜일까? 그것이 확실히 옳은 일이고 그 무엇보다 좋은 일이니까. 그런데 과연?
 

아이가 아주 잘 먹어서 건강한 어른으로 자랐는데, 스스로 앞가림 못하거나 예의가 없는 사람이라면? 내가 아이를 잘 먹이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여기고 아이에게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 잘 먹이려고 하는 것은 그래도 된다는 메시지를 품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고민을 하던 무렵 어떤 뇌과학자의 강의를 듣다가 아이의 뇌성장에 중요한 두 가지가 ‘배고픔의 경험(배고픈 것을 참고 무언가를 한 경험)’과 ‘(3세 이후) 방치의 경험’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 두 가지를 절대로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가 그런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게 사랑의 부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뭘 한 거지?
 

기실, 건강하면서 앞가림도 잘하고 예의 바른 사람으로 자랄 가능성이나 그 뇌과학자의 말이 얼마나 진리인지는 상관없었다. 실제로 아이가 클수록 (먹이고 재우는 일의 비중이 작아지기 때문에), 점점 더 잘 먹지 않아 기분 나빠진 내가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 일이 사랑하지 않는 일로 끝나는 것이다. 사랑의 역설이랄까?
 

비슷한 예는 무지 많다. 아이를 사랑해서 열심히 공부하게 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도록 온갖 지원을 해주었는데 성취 여부와 상관없이 전혀 행복해하지 않고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경우? 하지만 반대로 그런 부분에서 신경써주지 않은, 지원해주지 못한 부모를 야속하게 여기거나 원망하는 경우도 있다. 없이 자라 고생한 부모가 아이만큼은 결핍을 모르게 키웠더니 감사함을 모르고 되바라지는 경우도 있지만, 절제와 검약을 가르치는 부모에게 넌덜머리가 난 자식들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의견을 중요하게 들어주고 격의 없이 대하는 게 사랑일까? 권위와 예의를 엄격하게 가르치는 게 더 사랑하는 건 아닐까? 멋지고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어떤가? 자연스럽고 흐트러진 모습에서 더 배울 게 많은 것은 아닐까?


아니, 다 집어치우고, 어떻게든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애써 키운 자식보다 (어떤 이유에서든) 부모가 그런 노력을 딱히 하지 않거나 못했는데, 더 인간적으로 사회적으로 잘 자라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나는 길을 잃었었다.
 

시작부터, 기본부터 잘못된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내가 A라는 원인을 만들면 B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상황 역시 내가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여기까지 왔을 때 나는 무력함을 느꼈고, 비로소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고, 갑자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제야 ‘엄마가 행복해야 한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아이는 영원히 엄마를 행복하게 할 수 없고, 아이가 행복해야 엄마가 행복해진다는 믿음 자체가 아이를 불행하게 한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 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행복한 사람만이 바로 저 인과관계가 불명확하고 통제할 수 없는 세상을 견뎌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여기서 얻은 답, 나만의 답이 바로, 친절함이다. 내가 사랑하는 방법으로 택한 것들이 내 예상과는 다른 결과를 낼지 내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방법. 아이가 아니라 나를 삶의 주체로 두고 살면서도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실천할 사랑의 방법.


눈을 맞추고, 사랑스러워하고, 천천히 듣고, 같이 웃고, 함부로 말하지 않고, 배려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
 




사실 나는 ‘친절하다’는 말을 살면서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친절이 나의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내가 제일 못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식탁에다 우유가 아니라 물을 엎질러도 도끼눈을 뜨고, 차를 타고 가다 쉬가 마렵다는 말에 귀찮아서 짜증을 내고, 징징대거나 끊임없이 졸라대면 결국 분통을 터뜨리고 만다. 작은 실수나 잘못에 너그럽지 못한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자괴감에 빠진다.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쓰는 중에도 몇 번이나 그 감정에 맞닥뜨리고, 심지어 이 글을 마무리 짓는 지금까지도 이런 글을 쓰는 게 내게 의미가 있을까 (다짐해봤자 잘 안 될 테니까) 회의한다.


하지만 현재 내 삶에서 나를 제일 괴롭게 하는 일이니까 어떻게든 노력하기로 한다. 친절한 엄마가, 친절한 사람이 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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