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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Oct 30. 2020

겉모습에 속지 않고

내 아이 아토피 이야기




셋째가 돌 무렵 아토피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턱에 빨갛고 동그란 습진이 생겼다. 소아과에 갔더니 아토피가 의심된다고 했다. 이후 볼과 몸으로 습진이 번져서 피부과에서 아토피 진단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좀 당황스럽고 난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후로 반년 동안, 나는 ‘아토피’와 씨름했다. 아토피라는 질병과 치료법, 여러 사례와 명의에 대해 알아보고, 공부하고, 발라보고, 먹여보고, 찾아가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았다. 그러나 아이의 아토피 증상은 나아졌다 심해졌다 반복하더니, 결국 자리 잡고 말았다. 나는 아토피가 얼마나 괴롭고 힘든 병인지 정말 몰랐다.


하나. 우선, ‘왜일까, 왜 내 아이에게 아토피가 생겼을까?’를 스스로 자꾸 묻는다. 아토피란 병이 흔해졌고, 그 가능성을 알아서 걱정은 했지만, 정말 ‘내 일’이 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서 일어나선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처럼 ‘문제의 원인’을 찾고, 그 질문은 결국 ‘나 때문인가 봐… 내가 임신하고 뭘 잘못 먹었나… 셋째라고 제대로 보살피지 않았던 건가…’ 하는, 나를 탓하는 답으로 이어진다. 아니면, 천식 이력이 있고 지금도 철마다 아토피, 알레르기 비염으로 고생하는 남편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서, 입술을 깨물기도 하고.


둘. 하루 종일 아기를 보며, 눈 맞추고 젖 주고 밥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놀아주고… 할 때마다 상처투성이 피부를 본다. 하루에도 몇백 번을, 예쁜 아가를 볼 때마다 ‘아, 내 아이는 아토피구나…’를 떠올려야 한다. 고쳐주고 싶지만 원인도 모르고 완전한 치료법도 없는 병과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는 것 같다.


셋. 사람들이 지나치듯 던지는 말과 심상찮은 눈빛을 견뎌야 한다. 놀라고, 왜냐고 묻고, 어디서 들은 치료법을 전한다. 처음엔 나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아토피라 그래요.”라고 답하고, 귀 기울여 듣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보는 사람들마다 그러니 감당할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아기 얼굴을 가리게 되고, 외출을 삼가게 되고, 사람들의 시선을 외면하게 된다. 악의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질문에 답하지 않거나 차갑게 반응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지금은 나의 몫이지만, 아이가 커갈수록 아이의 짐이 되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 그리고 진짜 실제적인 괴로움은 잠을  잔다는 것이다. 아이는 밤마다 잠결에 온몸을 긁는다. 한번 긁기 시작하면 계속 여기저기 긁는다.  모습을 보는  안타까워 기도가, 눈물이 절로 나온다. 아이가 마구 긁다가 상처가 나면 아토피가  심해지니까 아이 손을  잡고 대신 긁어준다. 잠들지 못하고 칭얼대는 아이를 다시 재우려고 젖도 물리고 토닥이다가 자장가도 부르고 업어주고 하다 보면 그야말로 뜬눈으로 밤이 지나간다. 나도 아이도 잠을 제대로  자는 것이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다. 삶의 질이 말도  되게 떨어진다.


그래도 아기일 때 발병한 것은,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혹은 사춘기 때 아니면 성인이 될 때 등 면역력의 변곡점을 맞을 때마다 나아질 수 있다는, 80퍼센트는 없어진다는 말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붙들고 있었다. 이런저런 보습제와 민간요법을 열심히 찾아 희망을 갖고 시도해보고는, 이내 실망했다. 부작용과 내성의 위험이 있지만 즉각적으로 상태를 호전시키는 스테로이드 연고를 발라줄 때마다 내가 돌아올 수 없는 방향으로 또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불안해했다. 그런, 소소하지만 확실한 불행의 삶을 살고 있었다.  






대학 선배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 후에 카페에 앉아 친했던 사람들과 담소를 나눴다. 오랜만에 아이들 떼놓고 홀가분한 상태로, 반가운 사람들과 이야기하니 정말 즐거웠다. 어쩌다 셋째가 아토피라 걱정이라는 말을 꺼냈는데, 옆에 앉았던 언니가 말했다. “나, 40년 아토피안이야.”


이어서, 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어떤 치료를 받았었는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갓난아기일 때부터 아토피였고, 밤마다 온몸을 긁다 피투성이가 되곤 했고, 형제 중 본인만 아토피여서 부모님께 왜 나만 이러냐고 원망도 많이 했고, 아토피에 대해 일반인들이 잘 모르던 20-30년 전엔 겉모습 때문에 장애인이냐는 말도 많이 들었고, 그래서 공부를 더 열심히 했고, 고등학교 때 살도 많이 찐 데다 피부까지 엉망일 땐 자존감이 바닥이었고, 신께 날마다 울며불며 매달렸고, 유명하다는 피부과는 다 찾아다녔고, 그러다 나병환자 치료하는 곳까지도 가봤고,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때때로 심해진다는 이야기. 그리고 덧붙인 말, “아토피는 절대 완치가 없어. 완화될 뿐이야. 받아들이고 살아야 해.”  


나는 정말 놀랐다. 왜냐하면 언니를 안 지 20년 가까이 되도록, 언니에게 아토피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많이 나아진 상태이고 옷과 화장이 어느 정도 가려주기도 했겠지만, 언니에게는 어떤 다른 점도 없었다. 그러니까, 병을 오래 앓은 사람의 흔적 같은 것 말이다.


반년 동안 나의 신경과 일상을 갉아먹은 아토피라는 알 수 없는 병과 40년을 씨름했는데 이렇게 ‘멀쩡할’ 수 있다고? 멀쩡한 정도가 아니었다. 언니는, 그야말로, 내 기준에선 너무 멋진 사람이었다. 유쾌하고, 유능하고, 따스하고, 사려 깊고, 개성 있으면서도 유연했다. 동문 모임에서 없어선 안 될 사람인데 아마 언니가 소속된 다른 곳에서도 그럴 것이라 짐작된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언니가 참 좋았다.


아니, 아토피를 갖고 있으면 이런 사람일 수 없다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내가 그동안 이 언니에게서 아토피를 전혀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 언니의 언니다움 때문에. 그런데 내 딸에게서는 아토피만 보고 있었다. 아토피만…. 눈을 맞출 때에도 어제보다 나아졌는지 심해졌는지 살피느라 얼굴에 있는 아토피 상처를 훑었고, 예쁜 웃음을 보고도 ‘아토피만 없었다면 더 예뻤을 텐데…’ 하면서 아쉬워 어쩔 줄 몰랐다. 아이와 밖에 나갔을 때에도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보는 아이의 눈이 아니라 아이를 보는 사람들의 눈에 신경 쓰느라 경계태세를 취하고 방어적이 되었다. 아이가 가진 아이다움에 감탄하기보다는 아토피가 마치 이 아이의 모든 것을 휘감을 것처럼 전전긍긍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죽비로 얻어맞은 듯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통계로는 내 아이의 아토피가 결국 없어질 가능성이 많지만, 적은 20퍼센트에 속한다면 확률은 무의미하다.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붙들고 사는 것은, 그리고 낫지 않은 상태를 불행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으로 여기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가. 만약 이 아이가 평생 심한 아토피로 고생하고 살아야 한다면? 아토피가 주는 불편함과 괴로움에 더해, 내가 지금 그러듯이 ‘아토피만 없었다면…’ 하고 생각하고 아쉬워하는 데 에너지를 쓰고 있다면?  


문득 수많은 인생의 장애가 떠올랐다. 신체나 정신 발달의 크고 작은 장애, 가족의 문제, 성격이나 심리의 문제, 경제적 궁핍, 갑작스런 사고 등등…. 인간은 원래 불완전하고, 살아가면서 셀 수 없는 불편과 불운에 부닥친다. 누구나 그렇다. 어느 누구도 완전한 상태에서 모든 걸 갖추고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 내 아이도 마찬가지고, 보통의 아이들보다 조금 일찍 아토피라는 문제를 만났을 뿐이다. 사실 아토피가 얼마나 심한 문제냐 따진다면 명함도 못 내밀 일일지도.  


아토피가 있건 없건 이 아이는 그냥 소중하고 아름답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다. 그 언니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성품과 재능의 씨앗을 꽃피울 수 있는.  


언니를 만난 것을 얼마나 다행으로 여겼는지, 마치 신이 나에게 이걸 깨닫게 하시려고 언니에게 아토피를 겪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했다. 어쨌든 언니가 아토피를 겪었기에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나 역시 (그리고 내 아이도) 다른 것은 몰라도, 이 괴로웠던 시간의 의미를 적어도 하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살고 있는 것이다. 결말이 정해지지 않은 이야기를.






이렇게 마음을 다잡았지만, 여전히 아이를 보면 낫게 해주고 싶다. 여전히 치료법을 찾으며 노력하고, 아토피가 떠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도 상처보다 예쁜 웃음에 주목한다. 긁는 손보다 그림 그린다고 어설프게 색연필을 잡은 손에 주목한다. “휴… 어떡하니…”, “긁지 마!”라는 말 대신 “너무 예쁘다~”, “잘한다!”라고 말한다. 사실은 아이 피부보다 그 또래 아이들의 귀여움 때문에 눈을 못 떼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발견한다. 아토피 때문에 조심하고 못하는 것보다, 이 넓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붙잡는다.  


많은 사람들 역시 내 아이에게서 아토피가 아니라 내 아이를 볼 것이다. 내가 그 언니에게서 그런 것처럼. 누구보다 내 아이가 자신을 자신으로 보기를. 외꺼풀 눈이나 곱슬머리처럼 아토피가 자신을 나타낼 때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않기를. 혹은 나쁜 시력이나 왼손잡이로 인한 불편처럼 아토피 때문에 일상에 불편을 겪더라도 자신만의 꽃을 피우는 데 굴하지 않기를.


“엄마부터 속지 않을게. 겉모습은 아무것도 아니란다."




*지금은 거의 나았다. 하지만 조금만 방심해도 병변이 올라와서, 로션(제로이드와 아토베리어)은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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