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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Aug 23. 2023

육아 과몰입의 필연

어쩌다 엄마들은 육아를 인생의 전부로 만드는가

"'내 인생에서 이거 아니면 끝이야, 나는 이것만을 위해서 살아'라고 생각한다면, 내 정성과 시간을 그것 이외의 다른 것들에 쓰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의 직업을 내 인생의 전부로 만들거나 나를 정의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병 때문에 직장생활을 못하게 되면 내 인생은 곧장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ㅡ이유진, <죽음을 읽는 시간> 중에서




새삼 당연한 이치를 몰랐다는 듯이 살았었다는 게 신기하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한때 '엄마'로서만 살았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던 것 같다.


스물일곱 살의 결혼은, 15년 전 그때에도 비교적 이른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이 넷(아들 둘, 딸 둘)을 낳겠다는 구체적이고 강렬한 로망이 있었지만, 그래도 2년 정도 여유롭게 신혼을 누렸다. 마음이 급해진 것은 시동생의 오랜 연인과의 결혼이 가시화되면서다. 그녀는 연상이었다. '아마도 우리처럼 신혼을 가지진 않겠지? 이 집의 첫 아기는 나의 아이여야 하는데...!'(쓰기도 우습지만 진지했다) 서둘러 임신을 시도했다.


아이는 쉽게 생기지 않았고(피임을 안 하면 임신은 당연한 줄.. '생명이 기적'인 것을 가슴 깊이 깨달았다), 몇 개월 만에 생긴 아이는 10주 만에 유산되었다. 그때까지 겪어보지 못한 슬픔에 짓눌렸다. 그리고 동서가 임신했다. 그 소식을 조심스레 전하는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으며 소리도 못 내고 눈물을 줄줄 흘렸던 기억이 난다. 갈피를 못 잡고 허우적대다 무리하게 복직했는데,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뭘 해도 나아지지 않는 복통, 심한 동통, 오한과 발열, 오심과 구토, 설사, 그리고 피검 결과 백혈구 중 호중구가 정상 수치의 반 이하. 입원해서 역격리됐다.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 먹고 구토와 설사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쇠약해져갔는데, 그때 의사가 제시한 예상 병명 셋 모두 죽을병이었다. 조직검사를 하기 위한 수술에도 '패혈증으로 죽을 수 있다'는 동의서에 서명해야 했다.(그 말을 듣고 친구는 "원래 의사들은 별거 아니어도 그 지랄"이라 했지만)


수술을 앞두고, 새하얗게 밤을 지새우면서, 내 삶이 여기가 끝이구나, 낯설면서도 왠지 신기하게 익숙한 생각을 곱씹던 서른 살의 그때. 나는 내 삶에서 그동안 욕심껏 성취하려고 했던 것들과 이루지 못한 것들 모두, 정말 눈곱만큼도 아쉽지 않다는 데 놀랐다. 단 하나, 내가 사랑하는 (옆에서 곤히 잠든) 이 사람과의 조합, 사랑의 증거, 혹은 결실이 없다는 게 가슴 아리게 서운했다.


조직검사 결과, 내 병은 김빠지게도(?) '대증적 치료'만 하며 잘 넘기면 '자연치유'되는 '기쿠치병'이었다. 회복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지만, 어쨌거나 다시 살아난 것 같은, 덤으로 살게 된 것 같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순간을 맞은 것이다. 나는 이제 할 일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몸이 괜찮아지자마자 임신에 매진했고, 임신했다.





또 유산할까 봐 내내 노심초사하다 결국 품에 안은 첫째는, 너무나 소중했다. 목욕시키다 떨어뜨릴 것 같은 상상이 강박적으로 들었고, 아기가 자는 동안 손발톱을 자르고 나면 온몸에 진이 빠졌다. 친정엄마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나를 키웠던 그대로, 비과학적이고 구식인 옛날 방식으로 육아의 흔적이라도 남길까 봐 도움을 받을 때도 세상 깐깐하고 까칠한 사수처럼 굴었다.


일하던 여성이, 고학력이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던 여성이 처음으로 육아하며 집에만 있게 될 때 겪는다는 그 우울, 불안, 불만족이 내겐 전혀 없었다. 나는 이제 삶에서 다른 갈망이 전혀 없었고, 오직 단 하나 중요한 의미를 손에 얻었다고 생각했으니, 기쁘고도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육아에 몰입했다. 이러려고 아픈 시간들을 신이 주셨던 걸까, 하는 생각까지 하면서.


나는 초보였고, 아이는 예민한 기질이었고, 완벽주의자인 내가 원하는 육아의 수준은 높아서, 누군가 내게 표현했듯 '애 하나 키우면서 절절매고' 있었는데도, 나는 심지어 행복했다.

그간 나는 열심히 살았다, 열심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맹신할 만큼 체득했다, 이 아이는 내게 너무 소중하다, 내 남은 삶은 이 아이의 엄마로 사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생명', '존재'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정말 의미와 가치가 충만한 중요한 일이고, 나는 잘 해낼 것이다.

이런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내 삶을 갈아넣고, 남편의 삶까지 갈아넣도록 하면서도 뭐가 잘못됐는지 몰랐다. 잘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육아를 (아기는 아직 기저귀도 떼지 않았는데) 100미터 달리기 하듯 전력질주 하느라, 이미 헉헉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육아는, 한 번도 언성을 높이지 않는 육아는, 둘째가 나오고 인정사정없이 끝이 났다. 지속불가능한 육아였던 것인데,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내 마음은 아쉽기만 했다. 할 수만 있다면 계속 그렇게 해주고 싶은데, 둘째에게도 그래주고 싶은데... 그래야 마땅한데...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미안해하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더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대로 안 되는 상황이 원망스럽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해 내가 싫었고, 내가 그럴 수 있도록 더 도와주지 못하는 남편이 못마땅했고, 그런 내 마음을 모르고 (당연히) 제멋대로 하고 우는 아이에게 짜증이 났다.


이쯤 내 원래의 가족계획은 깨끗하게 포기했다. 내 깜냥은 둘도 벅차니까.

그리고 멀리서나 가까이에서나 희극적이게도, (처음엔 식겁해서 비명을 질렀는데, 이내 어이가 없어서 진짜로 웃음이 나왔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으로 셋째가 생겼다.





2016년 끔찍했던 여름을 기억한다. 최악의 폭염, 처음 산 집으로의 이사, 시아버지와 사별한 시어머니의 이사(남편은 장남이다), 그리고 첫째 때도, 둘째 때도 그랬듯이 미쳐버릴 것 같은, 죽을 것 같은 입덧.

여왕 대접은커녕, 역시 과부하 걸린 남편의 ‘당신만 힘드냐?’는 말을 들었다(오. 이 남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울컥해서 아이를 지울까 생각이 스쳤고, 스스로 놀라 엉엉 울었다. 진짜 다 틀렸다고 생각했다. 엉망진창이라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 제대로 하긴 글렀다고.


어찌어찌 셋째를 낳았고, 아이는 아장아장 걸어다녔다. 무슨 정신으로 살았나 모르겠기도 하고, 영혼까지 끌어모았다고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육아를 시작할 때는 에너지와 기꺼움이 만땅까지 차 있었는데, 이제는 내게서 나와야 할 것들은 다 소진됐고, 쥐어짜진 나는 너덜너덜했다. 길에서 느닷없이 퍼지지만 말자는 생각으로 나를 굴렸다.

육아가 잘 되어가고 있었다면 거기서 새 힘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유난하게 최선을 다해 키운 첫째는, 그리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애써 키운 둘째도, 글쎄... 잘 컸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셋째는 아토피가 심했다. 결핍과 잘못된 점을 보려면 끝도 없이 보였고, 아이들과 나와의 관계도 좋은 건지 안심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내가 좋은 엄마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거의 날마다 화를 내고, 놀란 토끼눈이나 눈물 맺힌 눈을 보아야 했으니까.

모든 게 흐렸다. 나는 종종 멍했다.


눈을 돌릴 곳도, 말을 나눌 곳도, 마음 둘 곳도, 마음을 나눌 곳도 없었다. 8년 동안 나는 '나'로 살지 않았으니까. '나'의 이름도, '나'의 일도, '나'의 꿈도, '나'의 친구도 없었다. 내 모든 시간, 내 모든 일상, 내 모든 관심사, 내 모든 관계가 아이들의 '엄마'로서 채워져 있었다. 그 ‘나’는 생각보다 매력적이지 않았고, 예상만큼 잘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답지 않았다.

그 무렵 영화 <툴리>를 봤다. 세 아이의 엄마가 어떻게 망가져 있는지 보면서, 나도 아슬아슬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내 젖을 떼고 첫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쯤이면 퍼져도 된다고 생각한 건지) 드디어 툭, 어떤 끈이 끊어졌다.  





육아서만 읽고, 육아 관련 블로그/영상/팟캐스트만 보고 듣고 할 때, 내가 가장 의지했던 육아 멘토는 서천석 님이었다. 그런데 '첫째를 키울 때도 에너지의 70퍼센트만 쓰라'고 한 말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100퍼센트 할 수 있는데, 왜? 해줄 수 있을 때 해줘야지, 왜? 못해준 것은 언제, 어떻게 채우라고?


나는 열심히 하는 병, 같은 것에 걸렸던 게 아닐까?

열심이 나를 구원할 줄 알았다.


가끔 보드게임을 할 때, 삶은 보드게임 같지 않구나, 딴생각에 빠진다. 규칙도, 목표도 가르쳐주지 않고 주사위를 굴리고 갖은 일을 당하게 하고 선택하게 한다. 나는 규칙과 목표를 알려주면 잘하는 타입인데.

내가 터득한 '열심'이라는 무기 하나 가지고 대략 30년을 잘 살아왔는데, 된통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게다가 나는 '엄마'라는 목표에 몰빵했던 것이다. 잘하고 있는지, 결과가 나온 건지, 아니 언제 나오는 건지, 나오기나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정확히 원인(나의 열심)과 결과(좋은 엄마, 잘 자란 아이)가 상관관계가 있는지조차 모르겠는 분야에.

아니다. 아이들은 특별히 잘 자라지 않았고, (가끔 평화롭게 말이 통하지만) 보통은 울고 제멋대로고, 나는 (가끔 친절하지만) 보통은 승질을 내고 까칠했으므로, 확실히 실패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이제 어떻게 하지...

그렇게 나는 무너졌다.





내 경험이 특별한 것처럼, 나라는 사람, 그때의 상황이 나를 육아 과몰입 상태로 밀어넣은 것처럼 썼지만, 다른 엄마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각자 다른 이유로, 이를테면 나이, 건강, 유년시절, 가족관계, 직업 등의 이유로 임신이 간절하고 아기가 특별히 소중하다. 물론 원래 자기 아이는 소중한 법이지만, 뭐랄까, 임신과 육아라는 극단적으로 개인적인 경험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건도 극단적으로 특별하게 만든다. 내가 위에 구구절절 썼듯이.


게다가, 이전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인데 어느 날 갑자기 24시간 임해야 한다. 실무자이면서 최종 책임자로. 실수는 (거의) 용납되지 않는다. 대신할 자는 없는데, 비교 대상자는 무한에 가깝게 널렸다. 지켜보는 이들은 불시에 고문처럼 군다. 잘하기는 어렵고, 못하기는 쉽다. 대가 혹은 결실은 없을 수도 있고, 있다고 해도 언제 얻을지 알 수 없다. (심지어 결실을 바라는 것은 불경하다) 그러나 잘하지 못했을 때 대가는 즉시 나타나서 끝도 없이 재생산되고, 되돌리기는 매우, 매우 어렵다. 삶에서 떼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렇게 어렵고 중요하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무장되었어야 하는데, 잠도 못 자고, 잘 먹지도 못하는 데다, 친구와도 멀어지고, 지지자도 (거의) 없고, (동지이자 지지자여야 할 남편이 방관자나 적대자가 되는 경우도 태반) 가족 외에 사회적으로 연결되거나 소속된 곳에서 떨어져나갔을 뿐 아니라 지식인이자 사회인으로서의 대화는 박탈된 상태에서, 그때까지 갈고닦아온 지적, 사회적 능력이 무력하며 무용해지는 시공간에 던져져서, 밤이고 낮이고 쉬는 시간 없이 오분대기조처럼 날마다, 그야말로 언제까지 그러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살다 보면, 글쎄... 반쯤 제정신이 아닌 것도, 육아 이외에 다른 것에 시간이든 에너지든 쪼개주지 못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





첫째가 백일쯤 되었을 때였나, 세상 여자(엄마)들이 다 이상하게 보였다. 이걸 다 했다고? 이 짓을 다 하고 저렇게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로 살고 있다고? 허!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해주고?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살 구멍을 찾는다는 걸, 삶에게 정신도 못 차리게 따귀를 맞다 보면, 아니, 이보세요, 잠깐만! 하고 손목을 붙잡게도 된다는 걸, 포기할 것은 다 포기하다 보면, 절대 이건 못 줘, 하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수수께끼 하나를 푼 것이다. 그렇게 나도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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