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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Nov 01. 2020

참을 수 없는 자유의지의 버거움

아이란 원래 말을 안 듣는 존재가 아닐까?




아이를 키우면서 깨달은 두 가지 진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 인간은 말을 듣지 않는다.

둘.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란 없다.





나는 원래 말을 잘 안 듣는 사람이다. 내 옆에는 우리 언니나 내 남편처럼 말을 잘 듣는 ‘착한’ 사람이 있었고, 그래서 내 머릿속에는 인간이 딱 두 부류(말 안 듣는 못된 인간/말 잘 듣는 착한 인간)로 구분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두 부류와 그 두 부류를 잇는 스펙트럼이 있을 것으로 개념화되어 있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센 첫째를 키울 때 나는 이 아이가 나를 닮아서 말을 안 듣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순둥이 둘째도 키워보고(다른 양상으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수십 권 육아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란 원래 말을 안 듣는 존재가 아닐까?”


자기주장의 빈도와 표현의 강도에 차이가 있지만, 말을 안 듣는 것이 아이들의 특징이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도, 말을 할 수 없을 때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뒤집고, 기고, 걸을 수 있으면, 말을 할 수 있으면 비로소 드러난다. 그것이 되는지 안 되는지(가능한지 아닌지,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려주고, 알아듣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느라 씨름하는 것이 내가 경험한 육아의 골자다.


그렇게 ‘아이는 말을 안 듣는 존재’란 명제가 뚜렷해질 즈음, 놀랍게도 어른이라고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군대에 다녀오거나 사회생활을 하거나 아이를 낳아 철이 들면, 아이처럼 막무가내로 그러지 않을 뿐, 여전히, 사이가 가깝거나 멀거나 사안이 중대하거나 가볍거나 잔소리이거나 명령이거나 남의 말을 안 듣는다. 좀 더 나은 사람은? 없다고 본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 ‘어쩌면 누군가는 죽고 나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처럼, 말을 안 듣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말을 안 듣는 존재’라는 사실은, ‘아마도 누군가는 말을 안 듣고, 나도 좀 그런 편이고, 내가 아는 누구도 그렇고, 누구는 그렇지 않고’와는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일단, ‘나는 혹은 내 아이는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가’라는 당혹과 울분이 서린 의문과 싸울 필요가 없다. 원래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 그리고, 누구를 대단하게 생각할 필요도, 누구를 손가락질할 이유도 없다. 알고 보면 다 똑같으니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도,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세상이다. 수많을 필요도 없다. 단 둘만 있어도 마찬가지다. 둘은 엄연히 모든 면에서 같을 수 없고, 잘 맞춰가거나 참아왔더라도 결국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맞닥뜨릴 것이다.


이것은 나와 남편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둘째를 낳은 후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나보다 먼저 세 아이를 낳아 키우던 친구가 “하나는 평화롭고, 둘은 할 만하고, 셋부터 진짜 육아다”라는 말을 했는데, 무엇보다도 ‘하나는 평화롭다’는 말에 절절히 동감했다.





아이들을 키우는 내 삶의 상태를 말하자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였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내가 계획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도 없었다. 나는 자고 쉬는 것은 고사하고, 먹고 싸는 너무나 동물적인 기본적 (욕구도 아닌) 필요의 해결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의 진로나 직업, 배우자와 관련된 중대하고 훗날에 일어날 일은 꿈 같은 얘기다. 오늘 하루 무엇을 할지도 계획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계획했다 하더라도 먹이는 일부터, 아니 옷을 입히는 일부터, 아니 씻기는 일부터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것을 겨우 해내고 집 문을 나섰다면, 카시트에 앉히는 일부터, 아니 차에 태우는 일부터, 아니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부터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아이가 하나일 때, 나는 아이가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고 기다려주고 따라가 주었다. ‘네 인생에서 이럴 수 있는 때가 언제까지겠어’라는 연민의 마음,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을 거 같아’ 하는 사랑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나의 본질적인 마음대로’를 억누르고 미루며 겨우 지켜가던 평화가 한 인간(둘째)이 같은 시공간에 더해지면서 말 그대로 모든 상황에서 불가능하게 되었다. 세 살 아이에게 ‘어린 동생을 위해’ 엄마가 너를 위해 그렇게 한 것처럼, 너의 마음대로를 억누르고 미루라고 할 수는, 가르치더라도 늘 지키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계속 아이가 하나였더라도 언제까지나 그렇게 해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은 나와 남편과 첫째, 이렇게 셋일 때부터 불안정한 기운은 꿈틀댔다. 남편과 내가 아무리 ‘사랑’이 지고의 가치이고, ‘자녀’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공통의 소중한 존재라는 데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금은 티격대고 때로 양보하고 대부분은 남편이 참았던 상황이, 넷이 되면서 아주 복잡한 경우의 수가 되었다. 마음대로 하려는 사람 넷이 한 시공간에서, 잠깐이 아니라, 먹고 자고 놀고 쉬고 꿈을 꾸고, 먹이고 재우고 놀아주고 쉬려 하고 꿈을 붙잡고... 살고 있었다.


그러다 다섯. 그래도 아이가 둘일 때까지는 (티격에서 나아가) 언성이 높아지더라도 도달할 목표지점이 있었고, 지켜야 할 틀이 있었고, 모든 문제엔 답이 있었다(고 믿었다). 셋째가 태어나면서 집구석처럼 내면도 일상도 난장판이 되었다. 모든 게 희미해졌고, 나는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아니, 내던졌다고 해야 할까.)





인간은 마음대로 뭔가 되어야 힘이 나고 신이 나고 살맛이 난다. 하루 온종일 크고 작은 문제로 각자의 자유의지가 날것 그대로 끊임없이 충돌했고, 감당은 내 몫이었다. 상황은 복잡했고, 조율은 어려웠고, 나는 갈수록 지치고 생기를 잃어갔다. 내팽개치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을 휴식시간도, 퇴근도, 휴가도 없다. 나를 다독이고 북돋을, 수고에 합당한 급여도 없다. 심지어 대충 혹은 적당히 할 수도 없다. 사랑하는 아이의 성품과 미래가 달렸고, 내 노후와 인생 전체가 걸렸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 모든 일을 감당할 내가 무너질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수면시간은 부족했고(그나마도 저질), 제대로 된 운동을 못했고, 자존감은커녕 자아감까지 잃어버렸고, 그렇게 쏟아 부은 내 노력에 대한 성취와 결과물은 뚜렷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잘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모두 피폐했다.  


그래도 역시, 아이들은 먹어야 했고, 잠을 자야 했고, 싸야 했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고, 안아주어야 했다. 나는 그런 상태로, 역시, 다시 요리를 하고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빨래를 하고 옷을 갈아입히고 안아주었다. 때로는 엉망이었고 때로는 그런 대로 해냈다.


(가끔은 아슬아슬했다. 내가 감당해야 할 상황이 따귀를 때리듯 몰아쳐 오면, 정신이 없었고 평정심을 잃었다. 아이들 앞에서 괴물이 되거나 한밤중 한없이 우울해졌다. 나를 붙들고 있는 줄이 툭 끊어져버릴 것 같았다. 친정엄마의 도움, 남편의 독박으로 겨우 얻어낸 시간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오랜 친구와 만나고 관심사의 전환을 하며 숨통을 틔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버티고 견디며 하루하루를 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원래 이런 게 아닐까? 누군들 모든 일이 자기 마음대로 될까? 인간은 완전하지도 전능하지도 않고, 모든 일은 그런 인간이랑 하는 것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험이 쌓이는 것. 나는 몇 년간 임신-출산-육아의 굴레를 지나며 빡세게 배웠을 뿐이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느 순간 나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악에 바치듯, “어차피 내 마음대로 안 될 거, 나도 내 마음대로 한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그런데 이 얼마나 괜찮은 발상인가? 그냥 내 마음대로 ‘하면’ 된다. 내 마음대로 ‘되게 하려고’ 전전긍긍할 필요 없이.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거나 인정받으려고 안간힘 쓰지 말고.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나도, 그냥,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내 마음에도 들지 않는 현실은 겸손히 받아들이자. 뭐가 좋을지는 모를 일이다. 내 통제를 벗어난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지 말고, 지금 여기를 조금이라도 괜찮게 만드는 지혜와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아도 결국엔 남는 사랑을 발휘할 수 있도록,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을 돌보고 가다듬자. 아이를 자유롭게 두는 것이 아이를 사랑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아이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고 스스로 책임지는 어른이 되도록 도우려 했던 것이니까. 아이의 자유의지를 (이쁘게) 보아주고, (선을 그어) 받아주고, (저질러진 것은) 뒷감당해주는 것이 엄마인 내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러다 가끔 폭발하는 것은 어쩔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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