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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Oct 22. 2023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와도

그때 가장 지우고 싶던 일, 요리.

시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후 시어머니가 우리 집에서 한동안 지내셨는데, (그럴 만한 다른 이유와 상황도 물론 있었지만, 가장 명시적으로) 그것은 시어머니가 ‘도저히 요리를 못하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수십 년을 남편을 위한 요리, 남편과 함께 식사하기 위한 요리를 하다가, 그 행위의 목적과 대상이 없어지자 그 행위를 안 하게 되는 것은 이해할 만했다. 다만 ‘못하겠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먹고 살아야 하니 요리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요리의 능력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아니고… ‘요리를 못하겠다'는 상태는 어떤 걸까?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내가 그 상태가 되었다. 일상이 잿빛이고,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낮에는 날카롭거나 멍하고, 어떤 일에도 신나거나 즐겁지 않고, 혼란스럽고 무기력한 중에도 나는 나의 일을 했다. 첫째를 학교에, 둘째를 유치원에 보냈고, 셋째를 돌보면서 빨래를 돌리고 개켰고, 설거지를 했고, 정리를 했고, 시간에 맞춰 기관에 간 아이들을 데려왔고, 놀이터에서 노는 동안 지켜보았고, 먹이고, 씻기고, 재웠다. 꾸역꾸역 그 일들을 했다. 짓눌린 채 억지로 끌려가듯 했을지언정 어렵진 않았다. 그런데 요리는, 할 수 없었다.





결혼 전에 요리라고는 어쩌다 계란 프라이를 하고 라면을 끓여 먹는 정도였는데, 결혼하자마자 완전히 달라졌다. 남편이랑 소꿉장난 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 내 소유의 주방이 생기고 요리 담당이 나여서 뭐든 ‘내 것'이라면 소중하고 제대로 하는 성미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몇 번 책 보고 해보니 뭔가 그럴싸한 게 만들어지는 게 엄청나게 신기하고 재미있어서였다.


그때 다니던 직장에서 내가 맡은 일 중에는 요리강사를 서포트 하는 일도 있었다. 그는 음악을 전공했고 그쪽으로 꽤 전문적인 경력을 쌓은 분이었는데 엉뚱하게 요리를 가르쳤다. 그는 내게, ‘요리는 누구나 조금만 열심히 해도 대가가 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했다. 그 말이 종종 떠올랐다. 물론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지식과 섬세한 차이를 내는 방법 같은 것이야, 당연히 교육이나 경륜이나 타고난 솜씨에 따라 수준이 달라질 테지만, 실제로 완전 요알못이 먹을 만한 음식을 내놓기까지는 생각보다 어렵지도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요령도 없고 익숙지도 않아서 ‘요리 시간’은 오래 걸렸다. 남편과 7시 퇴근 후 만나서 집에 오면 빨라야 8시, 그때 쌀을 안치고 요리책을 보며 한 줄 한 줄 따라서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고… 10시가 넘어 저녁을 먹던 신혼 시절… 오전 11시 반에 점심식사를 한 후 아무것도 못 먹은 남편의 지친 얼굴과 불안한 눈빛… “우리 그냥 아무렇게나 먹으면 안 될까…”)


아니 오히려 쉽고 할 만해서 놀라울 정도였다. 어머, 되네! 웬일이야, 맛있어!! 이러면서 신나게 요리를 해댔다. 해먹을 요리들이 줄 서 있어서, 신혼 3년 동안 기념일 말고는 우리 부부끼리 외식을 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 주말이면 특별요리를 한다고 요리책을 뒤적이고 있으면 남편은 침대에서 끈적이는 목소리로 묻곤 했다. “모도야, 인간의 3대 욕구가 뭐지?” 그럼 난 대답했다. “식욕, 수면욕, 요리욕.”


아무튼 남편은 해주는 대로 맛있다며 잘 먹었고, 나는 요리 자신감이 넘쳐났다. 반찬뿐 아니라 쿠키, 빵, 떡, 아이스크림까지 만들었다. 입덧이 심할 때는 요리를 못했고, 입맛 까다로운 첫째가 나온 후로는 요리 자신감 따위는 지워버렸지만, 어쨌든 나는 요리를 좋아했다. 아무리 해도 끼니마다 바다에서 산에서 들에서 난 온갖 재료를 가지고 오색으로 식판을 채우는 금손엄마를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어떤 요리를 만들까 고민하는 것도 좋았고,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사러 장을 보는 것도 즐거웠고, 재료를 손질하느라 손을 놀리고 소분하고 저장하고 제때 사용하느라 머리를 쓰는 것도 재미있었다. 볶고 찌고 굽고 맛을 내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들이 먹는 모습을 보는 것도 신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한 게 제일 맛있다며 속으로 말하며 혼자 웃는 날도 많았다.


입맛도 다르고 이의 개수도 저마다 다른 다섯 식구에게 맞춰 먹을 것들을 만드는 게 피곤하고 지치지 않은 적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도 ‘아이를 키우는 것은 곧 먹이는 일’이라고 결론을 낼 만큼 나는 요리에 진심이었다. 아이들이 어리기도 했고, 워킹맘도 아니고, 좋은 먹거리에 대한 결벽이 있는 나로서는, '먹이는 일'이 내가 당연히 잘해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최선을 다했다.


지인이 반찬 배달을 시작하고 일상이 얼마나 편해졌는지 모른다며 강추한다는 말을 했을 때, 워킹맘인 그녀의 상황을 생각하며 겉으론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건 아니지' 하는 생각을 했다. 나로서는 도무지 취할 것 같지 않은 옵션이었다. 입덧 때문에 반찬 만들기 어려울 때 반찬가게에서 사먹을 때도 겨우 한 끼 때웠다,는 심정이었지 앞으로 이렇게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하는 반찬가게를 찾아도 한두 번 먹어보곤 끝이었다.





그랬던 내가 요리를 할 수 없었다. 식사 준비 시간이 다가오면 불안했고, 싱크대 앞에 서면 막막하고 머릿속이 하얬다. 모든 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졌다. 특별하거나 새로운 요리가 아니라 늘 하던 요리, 나물을 무치고 각종 재료를 조리고 이것저것 넣어 밥을 볶고 육수를 내 국을 끓이는 것이 도무지 해낼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식단은 갈수록 간단해졌다. 생선을 굽고, 두부를 부치고, 계란 프라이를 하고, 오이를 잘라서 주었다. 냉동식품과 반조리식품을 데우고, 김과 낫또를 꺼내 주었다. 1년에 한두 번 먹던 배달음식을 한 달에 한두 번, 그러다 일주일에 한두 번 먹었고, 특별한 날 하던 외식도 잦아졌다. 나도 모르게 바지에 실수를 한 사람처럼, 식사 때가 다 되어서야 “저녁 준비를 아무것도 못했어..."라고 말하며 난처한 얼굴로 결정한 것이었다.


번아웃증후군이 극에 달했을 때, 도망가고 싶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고 싶다, 내 존재가 그냥 사라졌으면 좋겠다, 제발 날 좀 내버려뒀음 좋겠다,고 되뇌었다. 내 몸을 움직여 일상을 굴러가게 하고 내 머리와 마음을 움직여 아이들을 돌보고 요구에 반응해야 하는 모든 순간에 그랬지만, 그때 가장 지우고 싶던 일은 요리가 아니었나 싶다.


정신과 약을 먹고 나서, 웃음과 생기를 찾고, 아이들에게 급작스럽게 화를 내지 않고 아이들이 이뻐 보이고, 말수도 많아지고 발걸음도 가벼워지고, 글도 쓰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그렇게 일상을 되찾았지만, 요리는 여전히 어려웠다. 그때 생각했다. 요리라는 게 참 대단한 행위구나. 마치 아가들이 ‘죔죔’, ‘곤지곤지’ 하는 것이 어른들 눈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눈과 손의 협응력을 키우는 일, 그러니까 그동안 아기 뇌에서는 난리 나는 활동인 것처럼, 어떤 요리를 할지 정하고 재료를 알아보고 준비하고 손질하고 다듬고 조리하고 맛을 내고 시간에 맞춰 차리는 모든 과정이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사고활동이고 엄청나게 창조적인 활동인 것을 깨달았다. 그걸 내가 해내고 살았다니 대견하게 느껴졌을 정도로.


아무튼 나는 또렷한 정신으로 판단했다. 내가 챙겨주는 음식, 조리를 최소화한 식단, 냉동/반조리 식품, 포장/배달음식 등이 배달 반찬보다 결코 더 낫지 않다는 것을. 나는 지인에게 전화해서 연락처를 물었고, 즉시 주 2회 반찬 배달을 주문했다.


반찬이 오는 날은 몸은 물론이고 마음도 편했다. 생각보다 식단도 맛도 괜찮았고, 아이들도 잘 먹었다. 내가 애쓴 만큼 잘 먹어줘야 할 텐데 연연하지 않아서, 엄마로서 더 잘 먹여야 하지 않나 검열하지 않아서 가뿐했다. 살짝 아쉬운 양이었기에 남김없이 다 먹었고, 건어물 조림이나 짠지 같은 저장반찬은 남겨두고 요긴하게 썼다. 물론 나의 신념과 행동의 변화에 인지부조화를 느껴서 부끄러웠고, 아이들이 맛있게 먹으며 요리 솜씨를 칭찬할 때 ‘이건 엄마가 한 게 아니고... 산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민망했지만.


2주마다 정신과에 가던 때였고, 근황을 묻는 질문에 반찬 배달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요리를 좋아했고 아이들에게 내 손으로 요리해주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우울증이 오고부터 요리가 너무 어려웠다, 다른 건 약 먹고 많이 나아졌는데 그건 아직도 그렇다, 반찬 배달을 한다는 지인을 속으로 비판했는데 그에게 소개받아 주문했다, 정말 편한데 왠지 부끄럽고 전업맘으로서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 있다,고.


의사는 내 말을 듣자마자, 아주 잘하셨다고 했다. 의사의 그 반응이 왜 그렇게 좋았을까? 의사의 인정이 뭐라고. 어쨌든 그의 그 흔쾌하고도 명확한 즉각적인 반응에 내 마음이 훅 가벼워졌다. 그러면서 의사는 자신의 요리 못하는 어머니 이야기를 했다. 그 음식을 먹는 것이 사실 괴로웠다고, 요즘 편하게 사드시고 하시면서 아버지도 그렇고 다들 편하다고(ㅋㅋ).


그리고 내가 요리를 좋아했었던 것, 요리가 어려워져서 느끼는 상실감 같은 것에 대해서도, 돌아올 거라고, 그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반드시 돌아온다'는 확언이 믿음직스러웠다기보다, 당연한 사실을 상기시키듯 말하는 그의 태도에 나는 마음을 놓았다. 뭐든지 ‘나는 이래', ‘꼭 이렇게 되어야 해'라는 것에 얽매이지 말라고, 그런 생각이 문제가 된다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위로를 받았다.





이후로 나의 요리욕이, 요리력이 언제 돌아오나 나는 은근히 기다렸다. 요리하는 일상이 그리웠다기보다, 달라지는 나를, 이렇게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경험하고 싶었다. 이제는 요리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도,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주부로서 매끼 요리를 해야 한다는 것은 형벌과도 같은 일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코로나로 온 가족이 세 끼를 집에서 먹어야 하는 나날이 이어지던 지난해에는 진하게 그 벌을 받은 것 같고.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느 순간 또렷하게, 반찬 배달이 가성비나 여러 가지 면에서 덜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판단하는 때는 왔고, 주문을 끊었다. 일주일 한 번 배달음식 시키는 것은 거의 상수가 되었고 여전히 냉동식품과 반조리식품의 도움을 받지만, 종종 나물도 무치고 국도 끓이고 가끔은 가족들이 엄지 척 하는 특별요리를 내놓는다. 내 가족이 무심하게 잘 먹는 것도, 내가 스스로 만족하며 맛있게 먹는 것도 다 마음 깊이 기쁘다.


내가 요리를 신명나게 하며 산 적이 있는 것, 요리 실력에 좌절한 적이 있는 것, 도저히 그 모든 과정이 불가능에 가깝게 어렵게 느껴진 적이 있는 것, 가벼운 마음으로 반찬 배달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것, 지금 다시 제2의 요리 인생 궤도에 오른 것 모두 감사하다. 이 모든 것을 맛보았다는 점에서, 경직되지 않은 내 삶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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