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특별한 이야기만 글로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 마지막 부분에는, 매트릭스의 전모를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완벽한 세계인 적도 있었는데, 너무 완벽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짜 세계라는 걸 알았다.’ 나는 가끔 그 말을 떠올리며 ‘완벽한 세계라면 지금과 뭐가 달랐을까’ 하고 수수께끼 풀 듯 풀어보는데, 늘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답은 이것이다. ‘때가 안 생겼을 거야. 더러워지지 않았을 거야. 먼지, 세균, 곰팡이, 벌레가 없었을 거야. 그래서 이렇게 끊임없이 씻거나 청소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하지만, <매트릭스>에서 ‘완벽함'보다 결손이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완전한 세계의 세팅이었듯이, 지금 여기가 매트릭스든 꿈이든 그 무엇이든, 신이 있다면 이렇게 설계했을 리가 없다 싶은 세팅이 사실은 가장 완전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더러워지는 것 역시 본질적으로는, 씻거나 청소하며 결과적으로 얻는 것(상쾌함, 정결함, 부지런함의 미덕?) 말고, 이 세계를 굴러가게 하는 ‘썩는’ 과정, 유기물이 미생물의 작용에 의하여 분해되는 ‘부패'의 과정 중 한 부분이라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과정이 왜 그리 상쾌하지 않은지,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 과정을 모르고 싶을 만큼 끔찍하고 괴로운 것인지 모르겠다. (하긴, 그래야 게으른 인간이 씻고 청소하겠구나. 아니, 그럼 또 왜 인간은 그렇게 게으른 것인가? 아마 또 그래야 할 이유가 있겠지…)
유시민이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나와서 <죽은 자의 집 청소>라는 책을 소개했을 때, 책에 나오는 한 사례를 들며 ‘죽음 앞의 먹먹함'을 이야기하고 다 읽고 참 좋아서 다시 읽으려 했지만 그 감정 때문에 도저히 다시 읽을 수 없었다는 평을 했을 때,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붙들고 줄곧 느낀 것은, 무형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삶의 끝'이기보다는, 유기물질인 '인간의 몸뚱아리가 부패하는 시작'이라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인간 역시 썩어야 하고, 그 과정이 벌어진 곳을 청소해야 한다.
2020년 5월 30일에 1쇄를 발행한 책은 9월에 이미 20쇄를 찍었다. (유시민의 책 소개는 9월 30일이었으니 지금은 더 많이 팔렸겠지) 다른 사람들은 어땠을까? 나는 제목만 듣고도 이 책이 끌린다. 더구나 표지에 실린 아무것도 없이 비워진 방 사진이며, 금방 때가 탈 것 같은 약한 회색 바탕 한가운데 세로로 써넣은 명조체의 제목이며, 또 그 글자에서 영혼이라도 떨어져나간 것처럼 보일 듯 말 듯 그림자가 있는 것까지, 서점 매대에서 이 책을 보았다면 기필코 눈길을 멈추고 손을 뻗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들었을 때 생각보다 가벼운 양장의 무게며, 벌거벗은 것처럼 겉표지도 없고 책날개도 없어 표지를 열자마자 나오는 저자 ‘김완'의 소개를 읽으면, 벌써 굳어진 나를 휘저을 만한 어떤 책을 만났다는 설렘을 진정시키려고 본문을 뒤적일 것이고, 한두 페이지 훑어본 후에는 당장 덮고 값을 치른 후 책과 나만 남겨진 적막한 시간을 기다려 첫 장을 열었을 것이다.
대학에서 ‘시'를 전공했고 전업작가로 살려고 직장을 그만두고 산골로 갔다는, 그 후 여차저차 특수청소 일을 하게 됐다는 저자는 전작이 없는 것처럼 소개에 밝히지 않았다. (유령작가로 활동하며 여러 글을 썼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어쨌든 ‘이 사람 정말 시인이구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끄덕일 정도로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의미를 채워 꾹꾹 눌러 썼다. 그래서 나는 그가 쓴 속도만큼은 아니겠지만 도저히 빨리 읽어나가지 못하고 천천히 그의 말을 삼킨 후 눈을 옮겨야 했다. 어찌 된 일인지 차마 책 귀퉁이도 접지 못하고 색연필 같은 걸 들이대지도 못해서 (다시 읽기도 어렵다고 하니) 마음을 울리는 문장이 나올 때마다 밑줄을 긋는 대신 메모장에 옮겨 적었는데(메모할 문장이 너무 많아서 중간에 포기하기도 했다가), 그러면서 내 마음속에서는 이번 해 읽은 좋은 책들을 쭈욱 떠올리고, 2020년의 남은 날들을 세기도 하면서 아무도 관심 없을 고민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래, 어쩔 수 없다, 올해 최고의 책은 바로 너!’ 하며 자못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서야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앞부분 반은 죽은 자가 주인공인 청소의 이야기이고, 뒤의 반은 청소하는 자 김완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이다. 어찌 보면 개괄적인 설명도 있고, 크고 작은 궁금증들에 대한 답이 있는 뒷부분이 앞에 와야 할 것 같지만, 열자마자 죽은 자의 집을 들어서는 것처럼 시작되는 청소 이야기는 입 다물고 숨 죽이게 할 만큼 압도적이다. 거두절미하고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라는 듯 들이미는 이야기를 꾸역꾸역 그러나 게걸스럽게 듣다 보면, 인간이 죽고 난 후 일어나는 일에 대해 기초적인 것도 몰랐다는(예를 들어, 죽고 며칠이 지나면 몸에서 엄청난 양의 피와 기름이 흘러나온다는 사실도 몰랐고, ‘사람이든 고양이든 척추를 가진 포유류가 썩는 냄새는 한번 경험하면 다른 냄새와 오인하지 않을 만큼 고유하다’는 그 냄새에 대해서도 나는 모른다.) 부끄러움과 함께 기필코 드는 좌절감이 있다.
이렇게 특별한 이야기만 글로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특별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만 글을 써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글을 쓸 수 있으려면 뭔가 특별한 경험이 있거나 위대한 사람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은 읽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겸손하게 나는 그렇지 않으며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깔끔하게 글쓰기를 관두거나 어떻게든 특별하거나 위대한 삶을 살기 위해 박차를 가하기로 결단을 하거나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런 내 심각한 고민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하는 말이 있다.
ㅡ특별한 일을 하시니까요.
ㅡ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ㅡ숭고한 일이잖아요.
부단히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평범한 내가 점점 특별한 사람이 되고, 하는 일마저 대단해지는가? 천만에. 행여나 그런 달콤한 착각이 있다면 홀로 죽음을 맞이한 이의 집에 도착한 순간 산산이 조각나게 마련이다. 또 마음 한구석에 그 특별함의 조각들이 미련처럼 쌓여 여전히 반짝거리면, 청소하며 집 안팎을 분주히 드나드는 동안 더욱 잘게 바스러지고 결국 먼지가 되어 허공에 흩어질 것 같다.
(중략)
차라리 여기 있는 모든 것이 특별하다고 말하면 어떨까. 지금 여기에 모인 사람 가운데 특별하지 않은 이가 아무도 없다고 말하면 어떨까. 특별하다는 관념은 언제나 가치 없는 것이 있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모든 것이 가치 있고 귀중하다면, 지금 여기에서 특별하지 않은 것이라곤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면 무척 행복하고 평화로울 것 같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도, 성적을 비관하며 아래만 바라보며 걷는 학생도, 수레를 끌며 엘리베이터 문에서 나서는 택배 배달원도, 커피 위에 우유 거품으로 무늬를 새기는 바리스타도, 승용차를 타고 출근길에 나서는 거주민을 향해 일일이 거수경례로 배웅하는 경비원도… 어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특별하다고 말하면 어떨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고귀하다고, 그리고 내가 하는 이 일도 너무나 소중한 직업이라고…
ㅡ당신이 하는 일처럼 내 일도 특별합니다.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인 귀중한 사람이 죽어서 그 자리를 치우는 일이거든요. 한 사람이 두 번 죽지는 않기 때문에, 오직 한 사람뿐인 그분에 대한 내 서비스도 단 한 번뿐입니다. 정말 특별하고 고귀한 일 아닌가요?
(137-139쪽)
가만 듣고 보면 그 이야기는 또 틀린 말이 아니어서, 아니 아름답기까지 한 이야기여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기로 하고 끝내 나를 다독였다. 그가 하는 일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특별한' 일이라고 추켜세우지만 한편으론 ‘천하의 천한' 일이라 여길 테고,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그 일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니까. 나 역시 내 일과와 삶에 대해 하잘것없다는 생각과 부풀려진 치하 사이에서 괴로운데, 내게 주는 진정한 의미를 있는 그대로 보고 때로는 캐내어 붙잡기 위해서라도 글을 써야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청소의 기억으로 가득한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꼽을 만큼 더러운 인도 게스트하우스 화장실을 (당연히 무보수로) 청소한 후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성취감과 행복을 느꼈'다는 그를,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도기용 광택제를 뿌려서 변기와 세면대를 천사장 가브리엘의 이빨이라고 할 만한 수준으로 하얗고 눈부시게 닦아놓으면 마음이 참 뿌듯해’지며 ‘더러움이나 불쾌함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그 자리엔 그저 순수하고 충만한 행복이 남는다’는 그를, ‘청소 후'가 어떻든지 간에, 그때 무엇을 얻을 수 있든지 간에 청소가 꺼려지고, 내 손으로 완벽한 세계를 만들 수만 있다면 더러움도 청소도 없애고 싶은 나로서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수도꼭지의 아이러니는 누군가가 씻는 데 도움이 되고자 만들어졌지만 결코 스스로 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집이라면 그가 누구든 그곳이 어디든 가서 군말 없이 치우는 것이 제 일입니다만 정작 제가 죽었을 때 스스로 그 자리를 치울 도리가 없다는 점이 수도꼭지를 닮았습니다. 언젠가 죽은 이가 숨을 거두고 한참 뒤에 발견된 화장실에서 수도꼭지에 낀 얼룩을 닦으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다고. (248쪽)
그의 말대로 ‘혼자 살기 힘든 것도 인생, 혼자 죽기 힘든 것 또한 우리 인생이다’(저자는 이 말을 ‘죽음’ 정확히는 ‘자살’의 순간에 대해 한 것이지만, 죽음 전반의 과정에 대한 것으로 봐도 마찬가지다). 네 살짜리가 모든 일에 “내가 할 거야!”를 외치는 것도, 사춘기 청소년이 부모의 돌봄노동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처럼 반항하는 것도, 드디어 어른이 되어 내 돈 벌어 내가 쓰고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아무 간섭도 받지 않고 산다고 삶을 마치는 것도 저 혼자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우습다. 인간은 혼자 태어날 수도 없고, 한동안 다른 사람의 돌봄 없이는 생명 유지가 안 되는데, 그야말로 죽은 후에도 다른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은 잘난 척을 할 수 없다는 게 결론이다.
이 책을 읽는 중에 지인에게 추천했다가, “유시민이 추천하는 걸 들었지만, 늘 생각하는 이야기고 알 것 같은 이야기라서 굳이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저자는 ‘일이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대해, ‘보람이 있다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언제나 대답하기가 어렵다며 왜 그런지 길게 설명한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힘들지 않다고는 말하기 힘듭니다. 즐겁지 않다고 말하기도 힘듭니다.”인데, 나는 그의 이러한 점, 적확한 답을 위해 공들여 들려주는 단순하지도 명쾌하지도 않은 설명들이 맥빠지거나 답답하거나 지겹기보다는 온통 재미있고 흠뻑 빠져들 만했다.
이 책의 내용이 과연 뻔한가, 누군가에게는 새로울 게 없는가, 그것은 모르겠다. 하지만 나 같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모조리 건들고, 흔들고, 휘젓는 이야기일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