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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 그때 나에게 손잡이 같은 책

모든 후회와 걱정과 무기력과 자기연민과 욕심들은 내려놓고

by 모도 헤도헨

솔직히 말하자면 백작은 전날 책상에서 처음으로 그 책을 집어들었을 때 약간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한 권의 책으로서는 사전이나 성경ㅡ그런 책들은 필요한 내용을 참고하거나 마음먹고 정독하는 용도의 책이지 ‘읽는’ 책이 아니다ㅡ에 버금가는 밀도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에이모 토울스, <모스크바의 신사> 중에서)


평생 호텔에서 한 발짝도 나가면 안 된다는 연금형을 받고 스위트룸에서 종탑 꼭대기 방으로 쫓겨난 이틀 후인가, 모스크바의 신사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비장하게 들고서 하는 생각이다. 나는 그 생각을 읽고 (<수상록>은 아직 읽지 않았지만) 사전과 성경을 비슷한 책으로 묶은 것에 웃었다.


분량이나 밀도에서도 그렇지만, 각 권마다 문맥이란 게 없어서 (혹은 발견하기 어려워서)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중학교 1학년 때, 그러니까 읽기에 자신감이 붙고 이제 막 하나님을 실제 삶에서 경험하기 시작한 때에, 여름방학을 앞두고 나는 자신 있게 말했었다. “이번 여름방학 목표는 성경을 다 읽는 거예요.” 1700쪽이 넘는데도 두껍긴 하지만 ‘한 권’이라는 생각을 한 것도 실수였지만, (그래도 재미난 소설이라면 방학 중에 일주일에 일반 두께의 책 두 권씩 못 읽으랴) 말투도 도무지 집중되지 않았고(‘~하였으매’... 매? 매? 이게 무슨 뜻이지? 그땐 지금같이 ‘쉬운성경’이나 ‘메시지성경’ 같은 번역판도 없었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이긴 하지만, 그러니까... 너무 재미가 없었다. 창세기를 겨우 읽고 출애굽기를 조금 읽다 말았던가, 아니 창세기 반도 다 못 읽었던가, 아무튼 펼치기만 하면 어떤 심연으로 빠져들다가 때려치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중학교 때 여차저차 끙끙대며 통독을 한 것 같긴 하다. 많은 부분을 ‘글자’만 읽으며 넘겼다. 시편에서 잠깐, 그리고 신약성경에 들어와서야, 이제 줄을 긋고 음미하고 암송할 만한 구절들이 튀어나와서 성경이라는 책에 대해 안심을(내가 왜?) 했었던 것 같다.


대학교 2학년인가, 방학중 기독교 동아리에서 열었던 일주일 간의 성경학교 같은 것에 참여했는데, 그때 엄청나게 집중해서 (수업에 제대로 참여하기 위해 집에서 혼자) 일주일 만에 신약성경을 다 읽었다. 그때 이글거리던 느낌이 기억난다. 꾸준히 하루에 조금씩 읽으며 성경을 깊게 묵상하는 것도 좋지만(왜냐하면 이전의 것들을 몽땅...까지는 아니겠지만 까먹어서 늘 새롭다!), 짧은 시간에 (나름) 방대한 내용을 받아들였을 때 느낄 수 있는 어마어마한 감동이 있다.


이후 그때의 밀도로 읽은 적이 없다. 1장(쪽수가 아니라 챕터의 의미)이 안 되는 짧은 본문을 깊게 묵상하는 큐티를 꽤 오래 꾸준히 하기도 했고, 꾸역꾸역 하루 3장씩 읽으며 통독을 향하여 가던 나날도 있었고, 일주일에 한 권(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 권당 짧게는 1장, 길게는 150장까지 분량이 제각각이다)씩 읽기도 했다. 직접적인 이야기나 가르침인 신약보다 간접적인 구약을 통해 더 깊은 감동을 받기도 했다.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은, 읽다 보면 빠져들어서 호그와트 후려칠 정도로 그 세계에 가 있는 영광스러운 경험도 할 수 있긴 한데, 한번 손을 놓으면, 성경은, 대체, 당최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책이라는 것이다.

그때 나에게 손잡이 같은 책이 요한복음이랄까.



요한복음은, 마태/마가/누가복음과 함께 4복음서 가운데 하나다.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라는 같은 주제를 두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각각 쓴 것인데, 앞의 세 개의 복음서는 공관복음, 그러니까 같은 관점을 가진 복음서이고 요한복음은 조금 다르다. 읽어 보면, 정말 네 개의 복음서가 조금씩 다른 것을(저자가 다르니까 당연히 화법이 다르고 중점을 둔 부분도 다른데, 거기다 에피소드 선별에서부터 배열, 가끔은 내용까지도 조금씩 다르다) 알 수 있는데, 그중에서 요한복음은 확실히 뭔가 더 다르다는 것을 처음 읽어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대부분의 일화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인 것도 그렇지만, 뭐랄까, 요한복음은 형이상학적이다.


시작을 볼까.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비롯되는, 다윗을 거쳐 예수님에 닿는 족보를 댄다. 마가복음은 구약에서 예언된 존재,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세례자 요한(요한복음을 쓴 제자 요한과는 다른 인물이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누가복음은 같은 이야기를 마가복음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풍성하게 한다.(실제로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인 책이 마가복음이다. 다른 저자들이 마가복음을 참고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


구약의 처음이자 성경의 처음인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떠오르게 하는 구절이며, 이 한 구절만으로도 논문 같은 신학론이 나올 법한, 그러나 초신자에게는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하며 2절, 3절로 넘어갔다가 심각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심연에 빠질 것인가 이 책으로부터 빠져나갈 것인가 고민하느라) 먼산을 바라보게 하는 시작이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의 첫 기적,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 간음으로 붙잡힌 여인을 두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유명한 일화, ‘실로암’ 연못을 유명하게 만든 태어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고치신 사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일화 등 에피소드는 옛날이야기 듣듯 술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일화와 사건 사이사이 저자가 기록한 예수님의 대화, 설교, 기도 등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읽다가 이내 읭? 예수님..? 도대체 무슨 말씀을.. 네? 왜 동문서답을..? 예수님..? 갑자기 이 말씀을 왜..? 앞뒤가 안 맞는 거 같은데.. 네? 이게 도대체 무신 뜻..? 그러다 (다시 한번) 먼산 바라보는 눈길로 글자만 읽으며 (심연에 빠지지 않았다면) 속으로 실망감(성경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 못하는 나에 대해서?)과 싸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너무나 신적이어서 인간들이 감히 이해하지 못하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었다. 민중들 앞에서 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쉽게 끊임없이 비유로 이야기하셨고(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예수님 말씀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러다 식사 때가 되어 오천 명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도 일어나고),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꾼 삶이 부끄러워 아무도 나오지 않는 한낮에 물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말을 걸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영생수’로 주제를 바꾸어가며 대화로 전도해서, 사람을 피했던 바로 그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게 했던 분이다.


또 민중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는 예수님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는 사람들 앞에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위에 쓴 대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또 다른 복음서에서 그들이 (로마의 통치를 받는 유대인들에게 로마에 낼 세금을 걷는 세리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친일파와 같았다) “우리가 가이사(로마 황제)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대답하심으로써 머리 굴려 말로 함정을 놓는 사람들의 입을 닥치게 만드는 촌철살인의 대가였다.


그렇다면, 기록자인 저자 요한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겠고, 번역에 의심의 눈길을 던질 수도 있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떤 간절함 때문에, 내 마음가짐을 바꾸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부모는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언제 어떻게 먹고 자고 싸고 씻는지에 대해서 아이에게 쉽게 이야기하고, 또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옛날이야기도 해주지만, 때로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사랑하지만 안 되는 것이나 사랑하면서도 혼내는 이유에 대해서 아이들이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정말 알아듣기 어려운(혹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셨던 게 아닐까?


실제로 나는 그랬다. 요한복음을 읽을 때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려고, 논증하려고 할 때는 길을 잃고 헤매지만, 받아들이려고 하면 언제나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와 은혜를 발견한다. 성경 중 요한복음만 그럴까마는, 내게는 요한복음이 결정적으로 그렇다.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반적인 책처럼 밀접하게 연결되고 통일된 이야기 구조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절정’은 성경 중 예수님이 실제로 나오는 4복음서일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 중에서도 예수님이 잡히시기 직전 상황부터, 십자가 수난, 그리고 부활사건이 절정일 것이다.


요한복음 안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특히나 감동을 받는 부분은 마지막 장(21장)이다. 읽을 때마다 눈물을 쏟게 하는 베드로와의 대화.


먼저 복음서에 나온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지 보자. 예수님의 수제자로 알려진 베드로는 완전 솔직하고 적극적이고 진지한 캐릭터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날,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에서 설교하고 나서 말씀하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때 베드로의 대답은 이러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결과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가 잡혔다. 베드로의 반응은? 예수님 무릎 아래에 엎드려 말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한 것도 베드로였고(예수님이 “오라” 하셔서 물 위를 걷다가 무서워져서 퐁당!), 예수님이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시자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용감하게 말하고는 예수님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는 질책을 들은 것도 그였으며, 예수님 설교 중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는 말씀에 많은 제자가 떠나갔을 때(가장 가까운 열두 제자 외에도 제자가 많았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자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기특한 대답을 한 것도 베드로였고, 예수님이 제자 한 명 한 명 발을 씻어주실 때 (모두가 놀랐겠지만 가만있는데)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라고 말하고, 이에 예수님이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하시는데도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라며 만류하다가 예수님이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시자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주옵소서”라고 말하던 인물이며, 최후의 만찬에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예수님의 말에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인지 의심할 때 예수님 품에 있던 요한에게 ‘머릿짓’을 하며 누구인지 알아내라고 한 것도 베드로이고, 가룟 유다가 군대와 종교지도자들의 종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칼로 그중 하나를 쳐서 귀를 베어버린 것도 베드로,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완벽한 신앙고백을 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의 열쇠’, ‘베드로’라는 이름(‘반석’이라는 뜻)과 함께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약속을 받은 사람도 바로 베드로였다(그래서 최초의 교황이 베드로).


그리고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예언하자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비장하게 말한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언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고, 닭이 우는 순간 깨닫고 통곡한다.




요한복음 21장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보았지만 다시 고기잡이를 시작한 (뭐 어쩌겠는가?)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장면으로 시작한다. 처음 만남처럼 밤새도록 일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돌아오는 베드로에게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시고 그대로 했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고기가 잡힌다. 잡은 고기로 아침을 먹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묻는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리고 같은 질문. 같은 대답. 그리고 또 같은 질문. 세 번째 물으시니 베드로가 ‘근심하’며 답한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이 나를 부르신 과정, 예수님이 내게 보여주신 일들, 내가 경험한 예수님의 사랑, 나의 확신과 다짐과 예수님께 했던 약속, 예수님에 대한 나의 열정과 예수님을 따라 살려고 했던 나의 노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저지른 실수, 죄, 엉망진창인 삶. 나도 알고 예수님도 아는데.. 예수님이 내게 물으시는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럼 나는 모든 걸 거두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진심을 담아 대답한다. “네.” 그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셨듯 내게도 말씀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그 말씀에 나는 내 소명만 생각하기로 한다. 모든 후회와 걱정과 무기력과 자기연민과 욕심들은 내려놓고.


그러기 위해, 다시 성경을 읽으려고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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