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자, 돕는 자, 사랑하는 자
딸에게 읽혀도 되겠네 싶어 사둔 <아몬드>를 딸이 다 읽고 던져둔 지도 한참이 지나 집어 들었다. 책을 통해 뭔가 얻고 싶지도, 궁구하거나 깨닫거나 배우고 싶지도 않은 상태였다. 책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조금만 자기의 복잡하고 지루한 세계를 뒤로 보이며 나를 낚으려고 하는 걸 눈치채면 욕지거리를 뱉으며 당장 뒤돌아섰다. 어줍잖은 공감과 위로를 하려는 듯해도 내팽개쳤다.
그런데도 무료하고 공허하여서 책장을 서성였다. 언젠가는 꼭 읽으려고 했던, 궁금하기도 하고 쉬울 것 같은 아몬드를 꺼냈다. 첫 페이지에서, 아니 어디서든 더 읽고 싶어지지 않으면 당장 덮으리라 마음 먹으면서.
다 읽고 나니 이건 딱 청소년소설이네 싶은 깊이와 너비와 부피를 가진 이야기였지만, 어쨌든 단 한 순간도 하나도 힘들여 읽지 않았다는 점에서 내 인생에 찾아온 책이다. 사람도 책도 인연이 되려면 타이밍인데, 그런 점에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냥 그렇게 편안한, 밤에 자다 깨서 새벽에 내리 읽고 싶어질 만큼 재미있는 책이어도 그만이었을 텐데, 한 가지가 나를 건드렸다.
바로 이 책이 ‘방관자'에 대해서 말한다는 점이었다.
엄마와 할머니를 묻지마 폭행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어이없게 잃은 주인공은 방관하는 사람들을 의아하게 여긴다. 아니,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작가는 문제를 제기한다. 학교에서 곤이가 주인공을 괴롭힐 때나 곤이가 괴롭힘을 당한 기나긴 역사를 보여주면서도,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절대로 사랑하지 못할 것 같은 두 아이’에 대한 거라고 했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방관자들에 대해 꾹꾹 짚고 넘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너희들의 존재를 알고 있어. 너희들이 하지 않음으로써 한 일을 보고 있어. 그게 얼마나 잘못인지 보여주겠어. 그로 인해 사람이 어떤 고통에 빠질 수 있는지 말야.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불편했다.
여기서 잠깐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인격적인 선한 신'을 믿고 있고, ‘선하라'는 가르침, 심지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가르침을 내면화한 사람이다. 이율배반적이게도 세상에 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교리 역시 받아들이며, 그래서 신에게 의지하여 내 나름의 선을 추구하려고 노력한다. 실패할 때마다 뉘우치고 도움을 구하며.
그리고 나는 반골기질이 있고, 어찌된 일인지 세상의 마이너에게 동일시를 하며, 용감하진 못해도 의협심도 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 때문에, 자신과 상관이 없어서 혹은 유익이 없어서 잘못된 일이 눈 앞에 벌어지는데도 침묵하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잘못되어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학교 안에서 힘센 아이가 누군가를 괴롭힐 때 반 아이들이 ‘하지 마!’라고 말하기만 해도 가해자의 행동을 멈출 수 있다는 실험에 전율했으며,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결말에서 까불이가 자기 같은 괴물은 널렸고 언제든지 또 나올 거라고 말했을 때 그래도 착한 사람들이 언제나 더 많고 끝까지 힘을 합쳐 싸울 거라는 용식이의 대답에 감동하며 희망을 찾았던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만 한 것이 아니고 학창시절에 일진들이 약한 애들의 물건을 빼앗을 때 다시 빼앗아오기도 했고, 수학여행 때 왕따에게 모진 말을 던지는 친구들에게 따진 적도 있었다.
철이 든 이후로 누군가를 따돌리는 작당에 어떤 식으로든 함께한 적이 한 번도 없고, 오히려 어떤 식으로든 왕따인 사람만 보면 친구가 되려고 했다.
개과천선한 이후로 늘 적선할 돈을 가지고 다닌 장발장을 본받으려고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만나면 줄 수 있도록 잔돈을 꼭 주머니에 넣고 다닌 시절이 있었고, 노약자에게 자리 양보도 하려고 했고, 헌혈도 정기적으로 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요지는, 나 역시 방관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세상에서 방관자의 위치에 서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해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몬드>의 저자 손원평의 주장에 동조하며 혈기가 끓어올랐어야 마땅한데, 그러기는커녕 마치 내가 욕 먹은 것마냥 반론을 펼치고 싶은 마음이 슬슬 솟구치는 것이었다.
이런 인지부조화라니. 당황스러웠다.
마치 잃을 게 없는 젊은 시절엔 진보주의자였다가 나이가 들면서 사회에서 안정된 지위를 얻고 지킬 게 많아지자 혹은 세상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걸 깨닫고는 보수주의자가 되어버린 사람의 입장 같은 것일까? 생각하는 대로 사는 대신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 사람의 합리화 같은?
즉, 나도 살다 보니, 이래 저래 나 사는 데 바빠서 그리고 사실은 그러지 않기가 실제로는 너무 어려워서 방관자가 되어버렸고, 그걸 부인하지 못하고, 공격 받는 것 같으니까 변명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정작 명백한 가해자는 이해하려 하면서 방관자는 뭉텅이로 묶어 여전히 나쁘다고 하는 작가의 스탠스에 대한 불만이었을까?
분명히 마지막 부분은 맞다. 아무리 방관자들을 비판할 수 있다고 해도, 가해자보다는 아니지. 그건 마치 경찰이나 사법부가 온갖 불법과 착취를 일삼는 재벌들은 냅두고 시민들에게 ‘감시하고 막지 못했으니 너희들 직무유기야. 너네만 잘했어도 이런 일 안 생겼을 거 같은데?’ 하고 핏대 높이며 말하는 것 같으니까. 그럼 시민들이 반성하며 고개를 주억거려야 하나? 그건 아니지. 재벌부터 잡아쳐넣으라고 소리쳐야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방관자로 살기도 했었다는 걸, 가해자가 아닌 것이 어디야 하는 마음으로, 겨우 지켜내며 살았다는 걸 (때로 가해자였을지도) 깨달았기 때문에 불편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아침에 막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산책할 때도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중학교를 지나는데, 교문 앞에 한 여자 아이가 불행하고 불안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홉 시가 넘었는데 가방을 멘 채 교문 바깥 쪽을 바라보며. 무슨 일일까? 뭔가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닐까? 물어나 볼까…?
하지만 나는 결국 지나쳤고, 서너 번 뒤돌아보며 미련을 떨치지 못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봐. 역시 너는 방관자였어. 너는 이제 방관자의 삶에 익숙해졌어. 그런 말이 들리는 듯했다. 이제 나는 내 안의 손원평에게 더욱 구체적으로 반론을 펼쳤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그 아이가 처음 보는 아줌마, 그다지 도움 될 것 같지도 않은 아줌마에게, 설사 어떤 도움이 필요했다고 할지라도 사실대로 말할까? 혹시 말한다 하더라도 정말 네가 도울 수 있는 문제였을까? 혹여 도울 수 있는 문제라 할지라도 발 벗고 도울 수 있을까? 어디까지? 언제까지?
이를테면 만약 이 아이가 왕따고 특정 친구들에게 엄청난 괴롭힘을 받는 중이라고 하자. 그래서 학교에 가는 것이 두려워 등교하기 직전에 교문 앞을 넘어서지 못하는 거라고 하자. 내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신고? 그렇게 간단히 해결되나? 내가 이 아이 편에 서서 얼마나 열정적으로 싸워줄 수 있나? 지금 내 아이들 키우는 것도 벅찬 마당에. 물어보고 나서 아 그런 문제였구나, 그럼 아줌마는 바빠서 이만 총총, 하고 가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혹은 아빠의 가정폭력 때문에 목 어딘가 엄청난 상처가 생겼고 친구들이 알아챌까 봐 들어서지 못하는 거라고 하자. 내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신고? 아빠가 정신 차리고 폭력을 그만둘 때까지 우리 집에서 지내라고 하고? 그건 어려우니 가정폭력 피해자를 돕는 어느 기관에 들어가라고 설득하나?
나는 실패했던 개입의 경험을 소환했다.
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전학 왔다. 뭔가 이상했다. 눈빛이 어색했고 4차원인데 매력도 없었다. 코드가 맞지 않아서 대화가 엇나갔고 웃음 핀트가 전혀 맞지 않았다. 당연히 친구가 안 생겼다. 나는 그 아이가 왕따가 되게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친구가 되어줘야 할 것 같았다. 말을 걸고 식당이나 교실 이동시 동행자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우리 둘이 따뜻한 우정을 나누고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현실은, 나 역시 그 친구랑 있는 게 어색하고 재미가 없었다. 다른 친구도 없이 그 친구랑 단짝이 되어버린 상황도 짜증났다. 나는 그 아이와 잘 지낼 그릇이 전혀 아니었다. 내 마음은, 내가 너 왕따일 동안 친구가 되어줄 테니까 제발 왕따에서 벗어나줘. 이런 것이었고, 그래서 그 아이와 있으면 너의 이러이러한 점 때문에 친구가 없는 거야, 하는 마음만 가득해서 자꾸 그 친구의 어색하고 엇나가는 부분을 고쳐주려고 했다. 그러니… 그 친구도 내가 얼마나 불편하고 별로였을까?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이런 비슷한 일은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세 번이다. 그만큼 어떤 패턴처럼 그리 살았다. 대학 때도 어떤 후배에게 특히 더 관심을 쏟으며 제발 그러지 말라고 잔소리를 했고, 직장에서 일머리도 없고 매력적이지도 않은데 분위기 파악도 잘 못하는 어떤 동료에게도 먼저 다가가 말도 걸고 도움을 주려 했지만, 결국 나중에는 그 사람을 제일 함부로 대하는 게 나였다.
이처럼 나는 섣부른 선의와 의협심으로 나섰다가 된통 실패했던 경험이 많았다. 차라리 가만히 있었으면 더 나았을. 나는 (특히 어떤 관계를 통해) 누구를 돕고 말고 할, 그럴 만한 깜냥이 못되는 인간인 것이다.
덧붙이자면 기독교인 중에 나 같은 사람이 많을 거 같다. 섣부르게 선한 일에 나서는 거다. 선해야 한다니까. 선하고 싶어서. 하나님처럼 선할 수 있을 줄 알고. 그러다 자기 그릇의 한계에 이르면 갖은 핑계를 대고 내빼거나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다. 아니면 처음부터 ‘기도할게요’ 같은 엄청난 일인 것 같지만 사실은 손해 나는 것 없고 아무 힘도 들지 않는 일을 하겠다고 말한다. (물론 진심으로 ‘기도’로 돕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그래서… 더 밉고 더 못 믿는다. 그래도 모른 척은 안 했는데 말이다. 이런 우스운 입장이 되지 않으려고, 좋은 일 (하려고) 해놓고 욕 먹지 않으려고 차라리 처음부터 근엄하게 모른 척한다. 각자 사정이 있을 거라 말하며. 도움을 요청하면 할 수 있는 한 돕겠다며.
가만 둘러보면 사람들은 곧잘 선의를 행한다. 성금을 모으고, 금 모으기 운동도 한다. 응급차를 위해 길을 내주고, 지하철 밑에 사람이 끼면 힘을 합쳐 지하철을 든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시각장애인이 넘어지면 달려가 일으켜주고 끝까지 에스코트해준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피가 필요하다고 글을 올리면 당장 헌혈의집에 가 지정헌혈을 해준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정기적으로 후원해야 한다면? 금이 생길 때마다 내야 한다면? 응급차가 매번 따라온다면? 지하철 아래 깔린 사람이 늘 같은 사람이라면? 시각장애인의 전담 보행 도우미가 되어야 한다면? 피가 필요할 때마다 개인 연락처로 연락한다면?
그래도 사람들은 처음처럼 기꺼이 도울 수 있을까?
이렇게 ‘평생'을 가정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지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이 박동훈을 배신하고 숨어 있다가 박동훈이 찾아왔을 때 “그러게 왜 네 번이나 도와줬어. 누가 네 번보다 많이 도와주래?”라고 위악적으로 내뱉는다. 그랬는데도 박동훈은 이지안을 나무라지 않았고 도움의 손길을 거두지 않는다. 나는 이지안처럼 펑펑 울었다.
그러니까 그 네 번. 한 번도 두 번도 세 번도 아니고 네 번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그때까지 이지안을 도왔던, 도우려 했던 사람들 중에 네 번까지 돕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는데, 세 번쯤 도우면 바보가 아니고서야 사람들은 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쉽사리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앞으로도 계속 도와야 한다는 걸. 어떤 보답을 받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베풀어야 할 호의가 한두 번 해서 될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는다. 그렇게까지 책임질 수는 없는데… 내 코가 석잔데. 내 인생도 살아야 하는데. 그럼 내빼게 되어 있다. 아니면 나처럼 진짜 도움은 안 되면서도 옆에 붙어서 돕는 자처럼 서 있든지.
박동훈은 완전한 판타지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박동훈처럼 되고 싶어서, 박동훈 같은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서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역시 판타지다.
그렇게 결론을 내릴 즈음, 역시 또 책을 가리는 상태로 무얼 읽을까 고민하며 여러 책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어린 왕자>를 집어들었다. 20대에 읽고 10대 때 읽었던 것과 확연히 달랐던 놀라운 경험을 하고서 나중에 또 읽어야지 느긋하게 벼르던 책이었다. 지금쯤 읽으면 다르겠지? 좋았어.
그래서… 어땠냐면. (우선, ‘쉬운’ 이야기인 줄 알았더니 ‘생략된’ 이야기였다는 데 너무 놀랐는데, 이건 이 글과 상관없으니 언급만 하겠다.)
초등학생 때는 이게 ‘어른을 비판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대학생 때는 ‘우정에 관한 이야기’로 읽었다. 그런데 이번에 읽으니 이건 완전히 ‘사랑 이야기’가 아닌가! 어린 왕자가 자기 별을 떠난 이유도, 여행하며 내내 생각한 것도,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자기 별로 돌아가려 한 이유도 모두 가시가 네 개 달린 장미 때문이었다.
어린 왕자는 장미를 사랑하고, 장미도 어린 왕자를 사랑하는데… 장미는 어린 왕자에게 유리관을 씌어달라는 둥 까다롭게 굴고 가시가 있어서 호랑이도 무섭지 않다는 둥 허세를 부렸다. 어린 왕자는 지겹고 싫어졌다. 사랑으로 느끼지도 않았다. 장미를 떠나고 나서야 그것이 장미의 사랑표현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자기가 장미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이지 않고 찾을 수 없어도 저기 하늘 어딘가에 그 장미가 핀 별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늘을 보는 게 좋을 만큼. 그래서 약하고 순진한 장미에게 책임을 다하기 위해, 허세를 받아주고 까다로운 요구를 다 들어주겠다는 마음으로 자기 별로 돌아가려고 한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런데… 과연, 어린 왕자는 자기 별로 돌아가서 장미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까?
어린 왕자가 박동훈과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엔 선의가 아니라 사랑이 동기라는 점이다. 선의보다 사랑은 훨씬 힘이 세다. 하지만… 만약 장미가 전혀 변하지 않고(사실 어린 왕자가 장미의 사랑을 깨달은 것은 떠날 때쯤 장미의 달라진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계속 까다롭게 군다면,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린다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음, 장미꽃잎이 다 시들고 질 때까지(그게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고) 그런다면… 그래도 여전히 어린 왕자는 장미를 사랑할까?
나는 정말 ‘사랑' 만큼은 판타지가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내 대답은 노였다. 그래서 한 정원에서 자신의 장미와 똑같은 5000송이 장미를 본 어린 왕자처럼 울어버리고 말았다. 어떤 시절에는, 떨어져 있을 때는, 그러다 다시 만날 때에는 사랑으로 모든 걸 이해하고 감싸주고 헌신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영원히 그대로는 불가능하다. 어린 왕자라도.
길을 잃은 것처럼 허탈했다. 그러니 나의 결론은, 선의도 네 번 이상은 어렵고, 그걸 깨닫는 순간 시작도 어렵고, 사랑조차 판타지에 불과하니 모든 걸 방관하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섣불리 누굴 돕겠다거나 사랑하겠다거나 하는 오지랖 부리지 말고, 선의도 사랑도 바라지 말고 자기 처신이나 잘하면서?
며칠 밤을 또 괴롭고 우울하게 보냈다. 그러다 내 논리의 허점을 발견했다. 선의를 꼭 평생 베풀어야 하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는 선의는 의미가 없나? 사랑은 영원히 변함 없어야 할까? 어떤 상황과 환경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순수한 사랑만 사랑인가?
이건… 오만함이 아닐까? 인간의 선의와 사랑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함. 그러지 못할 바에는 시작도 하지 말라는. 그리고 영원하고 완전한 선의와 사랑이 아니라면 그건 선의나 사랑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누구도 선의를 영원히 베풀 수 없다. 뭔가 바꾸지 못할지도 모른다. 당연히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 누구도 영원히 한결같이 사랑하지 못한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없고, 나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인생을 구원하려고 선의를 행하고,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을 하겠다고 벼르고 사랑을 하는 게 아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엔 내가 할 수 있는 선택만 있기 때문이다. 이타적인 마음과 이기적인 마음 사이에서 고민할 수도 있고, 한계 때문에 좌절할 수도 있고, 한결같지 않은 마음에 스스로에게 실망할 수도 있고, 결국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에 부끄러워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원히 선의도 베풀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보다 나을 것이다. 어쩌면 단지, 원래 인간이 완전한 선의와 영원한 사랑을 갈망하도록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아마도 이유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