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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원의 골목식당>
: 이야기의 끝 따위

오늘 내가 해야 할 일과 내가 누릴 근본적인 기쁨은 매한가지

by 모도 헤도헨




요리를 위해 종종 레시피 검색을 하는데, 9할 이상 따라나오는 검색어가 있다. ‘백종원'. 김치부침개를 찾아도 ‘백종원 김치부침개', 소고기무국을 찾아도 ‘백종원 소고기무국', 떡볶이를 찾아도 ‘백종원 떡볶이'. 들어가보면 그의 레시피대로 만든 블로거가 9할 이상 덧붙이는 말이 있다. ‘집에 있는 걸로, 쉽게’. 이러니 그를 안 따를 수가 없다. 백종원 레시피가 아닌 페이지를 찾기도 어렵고.

몇 년 전부터 신문, 광고, 블로그, 뉴스, 그리고 직접 만난 사람들의 입에서도 백종원 이름이 끊이지 않아서, 백종원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고, 유명한 말투도 알고, 소유진 남편이라는 것도 알고, 길 가다 걸리는 게 그의 식당이라는 것도 알고, 그가 나오는 티비 프로그램 제목도 대부분 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움직이는 동영상으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일부러 안 본 거라기보다는, 꼭 다 본 것 같아서랄까.

며칠 전 어쩌다 (코로나 때문이라고 하자) 유투브에서 요리 영상을 봤는데, 연관 영상으로 백종원이 떴다. 그런 일이 처음도 아니었는데 처음으로, (코로나 때문인 것이다) 어떻게 말하는지 한번 볼까? 했다가,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의 서글서글함, 위트, 솔직하고 직설적인 표현, 굳이 겸손하지 않으면서 확실히 거만하지 않음,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자의 안정된 자신감, 어떤 일에 자기를 던져본 사람만이 갖는 후회 없음과 조급하지 않음, 현재를 사는 사람의 여백과 생기.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관 영상으로 뜨는 영상 중에는, 역시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어떤 취지의 프로그램인지 다 알아서 꼭 본 것 같은 <백종원의 골목식당>도 있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레전드만 볼까? 베스트 & 워스트도 볼까? 하이라이트 편집본까지만 볼까? 하다가 또 재미있어져 버렸다.

특히 백종원이 식당에 처음 가서 혼자 시식하며 맛 평가를 할 때 그것을 화면으로 지켜보는 식당 주인의 조마조마하는 표정과 백종원의 솔루션이 있은 후 식당 주인이 뭔가 잘못했을 때 백종원에게 혼나면서 보이는 반응이 백미였다. 뭐랄까. 어린아이, 어른이어도 젊은 사람에게서만 보던 표정이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세월의 흔적이 하얀 먼지처럼 내려앉은 늙은이들에게서 보이고, 학생이나 부하직원들의 것인 줄만 알았던 자세가 손바닥만 한 식당이어도 사장님에게서 나올 때, 동질감과 인간애, 아니 묘한 쾌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떤 깨달음과 함께. 사람들은, 인정받는 권위 앞에서, 잘 될지 안 될지 모를 때, 잘 되고 싶어서 절박할 때, 모두 자세를 낮춘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는 것은 그다음이다. 요식업계의 권위자인 백종원의 손길이 닿은 다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반응하고 다른 길을 간다. 맛, 청결도, 서비스 마인드, 메뉴와 가격을 비롯한 식당운영 등은 가끔 시작부터 백종원이 인정할 만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구체적인 조언과 도움이 필요한 상태고, 백종원은 이리저리 맞춤형으로 알려주고 가르치고 제안한다. 거기까지는 비슷하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배우고, 어떤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백종원이 제안한 이상으로 더 나아지려고, 자기들의 방식을 바꾸려고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적당히 한다. 방송이 나간 뒤에 유명세를 얻으면 어떤 사람들은 날개를 달고, 어떤 사람들은 감당하지 못한다. 결국 어떤 사람들은 백종원도 가르치지 못한 자신만의 스타일, 비법을 찾고, 어떤 사람들은 백종원이 가르쳐준 것도 소화하지 못하고 내치고는 원래 자신만의 것으로 되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백종원이 타박하면 어떤 사람들은 부끄러워하고, 어떤 사람들은 변명으로 일관한다. 그래서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백종원을 다시 만나면 어떤 사람들은 훨씬 편안해진 상태에서 원래 가진 매력을 발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제야 낮춘 자세가 가렸던 민낯을 드러낸다. 참으로 새삼스러운 모습들.

나는 그들의 표정과 말과 태도를 보면서, 장사로 드러난 모습, <골목식당>이란 방송에서 보여진 모습이 그들의 일면이겠지만 삶 일반을 보여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결과는 이미 나타난 게 아닐까? 저들의 모습 자체가 이야기의 모든 것 아닐까? 장사가 대박이 나는 성공, 쪽박을 차는 실패, 아니면 지지부진 겨우 먹고사는, 혹은 그사이 어딘가라는 결과는 부록, 잘해도 에필로그 정도가 아닐까?

압권의 드라마는 ‘포방터 돈까스집'이었다. 돈을 벌려는 게 아닌 것처럼 재료비를 아끼지 않고 작품 같은 돈까스를 만드는 사장은, 그래서 백종원이 솔루션을 해주었다기보다 맛집 발견을 해준 셈이 된 돈까스집은, 훈훈한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된다. 방송 덕에 갑자기 장사가 잘 되면 가격을 올리든지, 맛이 변하든지, 서비스가 후져지든지 하는데, 이 집은 시간이 지나도 인생 최고의 돈까스라는 후기가 이어졌고, 하루 100인분밖에 팔지 못하는 돈까스를 먹기 위해 사람들은 점점 더 일찍 줄을 서야 했고, 포방터 골목은 새벽부터 돈까스집 손님들로 메워졌다.
하지만 이야기는 언제나 예상대로만 흘러가는 건 아니어서, 장사가 잘 되고 돈을 많이 벌고 가난하던 사장 부부는 부자가 되고 돈까스집은 길이길이 명소가 되고 프랜차이즈가 생기고… 가 아니라, 손님들 때문에 불편하다는 포방터 인근 주민들과 상인들의 빗발치는 민원으로 사장 부부는 마음고생을 하고, 결국 (방송에서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상인회 때문에) 쫓겨나듯 포방터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알고 보니 그들은 그동안 떼돈을 벌기는커녕 모은 돈도 없이 여전히 손바닥만 한 전세 천만 원짜리 집에서 살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방송 보고 멀리서 온 손님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며 더 좋은 재료를 쓰느라, 그리고 돈이 모일 때마다 손님 대기실을 얻느라 그랬다는 것이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제주도의 크고 멋진 건물에서 여전히 북적이는 손님들을 맞으며 장사한다. 가격도 올리고 직원도 충원했으니 앞으로는 돈도 벌겠지.

이들에게 백종원의 골목식당은 무엇이었을까? 로또 같은 행운? 준비된 자에게 온 기회? 필연적인 결과를 앞당긴 촉매제나 기폭제? (아니면 그럴 운명?)
방송에 나온 다른 식당들이 다 돈까스집처럼 되진 않은 것이 증명하듯이 이들은 결과에 대한 자격, 성공의 이유가 충분했다. 그럼에도 골목식당이 이들의 달라진 삶에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무엇이 달라졌을까? 유명해지고 인정받은 거? 돈 벌 가능성이 확실히 높아졌다는 거? 어쨌든 지금 당장 돈이 없는 건 여전하고, 하루 종일 일하면서 작품 같은 돈까스와 최선의 서비스를 위해 노력하는 현실은 그대로인데.
우울증을 앓았다던 아내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우리가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게 아니었어.” 나는 이 말을 하는 안정되고 행복해 보이는 그녀와 이들의 달라지지 않은 일상을 본다. 그들이 받아든 인기와 인정이라는 성공과 그 성공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갖고 있던 언제 성공해도 이상하지 않을 성공의 자격을 본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끝을 알아서 속이 후련하긴 하지만 몰랐어도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내가 만약 박완서처럼 마흔에 등단해서 대작가가 된다면 왜 행복할까? 유명해져서? 돈을 벌어서? 인정 받아서?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감동해서? 그런 것들이 어떤 고민과 걱정은 덜어주기도 할 테고(물론 예상치 못한 다른 신경 쓸 일이 생길 것이다) 어떤 순간에 흥을 돋워주기도 하겠지만(그 흥이 내게 꼭 좋은 영향만 주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근본적인 기쁨은 내가 그런 결과를 받을 만한 글을 쓰고 있다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그럼 나는 어떤 결과가 언제 일어나든, 내가 원하는 결과가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글을 쓰고 있으면 되는 게 아닐까? 성적표를 받아들고 속 편해지고 싶은 마음과 확실한 결실을 위해 수고하고 싶은 마음은 너무도 강렬해 나를 흔들지만, 오늘 내가 해야 할 일과 내가 누릴 근본적인 기쁨은 이러거나 저러거나 매한가지라고, 내게 속삭여 본다.

<프렌즈>에서 결혼하고 싶은 피비는 비혼주의자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는 살 수 있어도, 어떤 일이 절대로 안 일어날 걸 알면서 살 수는 없어.” 인간은 결과 그 자체가 아니라 결과에 대한 갈망으로 사는 게 아닐까? 어떤 확실한 끝은, 역설적으로 다른 가능성을 확실하게 지운다. 인간이 미래 혹은 끝을 모르는 것은 가장 확실한 축복이 아닐까? 이야기의 끝 따위,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되는 색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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