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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씀씀 Nov 06. 2024

작년에 왔던 외로움 죽지도 않고 또 온 것에 대하여


봄이 올 즈음이면 대문에 대문짝만 하게 붙인다. 입춘대길. 그 대길이 아마 대길 중에 제일 네임드인 대길이리라. 추노의 대길이보다도 전국구로 더 유명하니까.


대문에 써붙인 입춘대길이 지금은 흔한 풍경은 아니지만, 그걸 보든 듣든 할 때면 생각 들기를. 봄은 참 좋겠다. 누구나 저렇게 두 발 벗고 두 팔 벌려 마중 나오니. 하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봄은 그저 우리 땅이 가진 계절의 루틴에 불과해, 와야 할 때 오고 가야 할 때 지 갈 길 떠나는 것뿐일 건데. 처음부터 예정됐던 등장과 이별인 일에 굳이 이렇게 맘 다해 봄과의 만남, 작별에 애달플 것인가. 그거 너무 저 녀석 콧대만 높이는 일 아닌가.


사람들, 저들끼리는 할퀴고 으르렁대느라 하루가 모자라면서, 그저 한 계절에 불과한 시기에는 순하다 순하다 그런 순한 양이 없게 수동적, 순종적으로 저자세가 된다고? 등등. 내 의식은 우주보다도 멀리 흐르며 세력을 넓혀가는 참이었다.


마침 할 것도 없던 참이니, 그 쓸 데 없는 것에 시간을 들여 골똘히 매몰해 본 결과. 봄은 그랬다. 도도히 와서는 인간들의 환호성과 아쉬움은 나 몰라라하며 갈 때 되면 가는. 나, 우리와는 분리된 객체.

그리고 어쩌면 나, 우리는 사는 내내 그걸 알고 있던 것인지, 세상 떠들석하게 맞이하는 '봄이 오고 가는 일'에 동요는 있었지만 당시의 일상을 저당 잡히지는 않았다.

그 계절은 누구나에게 그냥 되게 예쁘고 되게 좋은. 그 당시 모두의 백그라운드일 뿐이었으니까.


나를 시끄럽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봄과 제일 잘 어울리는 감정.


외로움

요즘은 이것 때문에 미칠 노릇 중이다.


흔히들 고독, 쓸쓸 따위의 히쭈구레하고 시무룩한 감정들을 가을과 엮곤 하는데. 나는 그게 경기도 오산 같았다. 가을에 외로운 게 왜? 그건 너무? 당연하게 학습 돼 온 거잖아. 가을이면 외로와라 외로와라, 외로운 게 맞다 하는 듯 노래, 시 등등으로 가을은 외롭다 울부짖는 세상인데? 안 외롭고 베겨?


가을이, 가을에 외롭다는 건 뻔해서 재미없었다.


반골 기질이 없는 건 아니지만 꼭 그 때문은 아닌 게, 오히려 그런 걸로라면 론니라는 감정은 가을 말고 봄. 그게 찰떡이 아니겠는가?


가을이야 상기 서술했듯, 내가 굳이 안 외로워도 이미 그 계절의 색감이 분위기가 공기가 선선하고 어딘가 낭만적이고 서글픈데, 거기에 외롭다는 류의 감정을 갖다 붙인다라. 너무 핵노잼인 연결. 그러니 가을은 안 외로운 사람도 얼마든 외로워져야만 정상 같이 느껴지게 되는, 사회적 요구로 만들어진, 법과도 같은 계절이란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봄이었다.


봄은, 보통은 들뜨고 살랑거리고 설레는. 인간들이 그러지 않아하고 싶어도 이미 그 계절의 천하가 간지러움으로 일렁이지 않고는 못 베기는 모든 걸 품었으니까. 그런 시기에 그, 사람 혼 빼는 요망한 하늘색과 흐드러진 꽃과 코를 감싸는 달큼한 냄새를 같이 즐길 누군가가 없다거나, 도저히 그것들을 즐길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면, 아니 세상 무슨 수로 안 외롭고 배기겠는가!


나의 외로움. 그것은 봄에 가장 처절했다. 그래, 그런 줄로 알았다.




응. 근데 지금 11월. 추위를 덜 타면 늦가을이겠고 추위를 많이 타면 초겨울인. 죽었다 깨나도 봄은 아닌 그 11월. 그 11월인데 나 왜 이리 처절하게 심심할까. 어떨 때는 이게 심심한 건지 재미있는 건지도 분간도 안 되게, 감정의 코너에 몰려있을까.


나의 외로움. 이름은 각설이. 작년 어느 때에 왔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지만, 분명 어느 때에 왔기에 노잣돈 충분히 챙겨 배웅했음인데 이거, 죽지도 않고 또 와버렸다. 지금이 봄이면 내가 어떻게 끼워 맞추기라도 하겠는데 하필이면 눈치도 없게, 서슬 퍼런 건조함으로 만물이 살 틀 것 같은 이 계절. 그것도 심지어 불혹을 목전에 둔 11월에 말이다. 로움아, 너 이럴 일이냐?


여기서 나를 잠깐 말하자면, 나란 애는 자기객관화를 작살나게 하면서 정신승리도 오지게 한다. 동시에 자기 주관화에도 기깔나게 재능이 있는 데다, 정신패배도 굴욕감 하나 없이 잘 해낸다.


마흔? 받아들였다. 39세가 된 새해벽두부터 내 머릿속엔 불혹 생각만 그득했다. 근데 그게 뭐. 3에서 4로 가는 일에 얼마나 다사다난한 과정이 있는지, 수포자인 내가 알 게 뭐며 그게 내게 뭔 의미를 가지겠는가. 차라리 생맥 3잔에서 4잔으로 가는 게 더 어렵고 더 값어치 있는 일일 뿐.


어정쩡하게 30대 끝자락 낭떠러지에 아슬아슬, 애쓰며 포함돼 있느니! 멋들어지게 40의 포문을 여는 게 더 값어치 있지 않을까? 잇츠미에게?


왜 그런 거. 내 거 중에 최고 이런 거처럼, 40살 중에 최고.... 는 아니어도 40처럼은 안 보이고 그리 안 여겨지는. 내 나이가 나를 깎아먹는 이상한 셈법이 아니라, 내 나이로 나를 더 높이는 그런, 간지 나는 인생의 한 단위를 맞고자 나는 얼마 전부턴가 순순히 정신 승리 중이다.


작년에 왔던 외로움이 죽지도 않고 또 왔어도, 내가 그 외루움 세 곱절 몇 곱절로 해피하게 리모델링하면 그만 아닌가? 인생만사 어차피 마음먹기 나름인데. 까짓 거 마음 잡수지 뭐.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나의 마흔을 기다리기로. 이 지긋지긋한 외로움을 벗 삼으며.


야 거기! 드루와 드루와! 마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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