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는 중이었지?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스스로 답하지 못하는 질문들을 뒤로한 채 차는 달리고 있었다.
어디로든 가야만 할 것 같아 무턱대고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이 길 위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은 오직 그녀 한 사람인 것 같았다.
달려가는 차들 번져가는 불빛 그 사이에서
그녀는 건조한 표정으로 앞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더 이상 길 위에 그녀 외엔 아무도 없는 시간이 되었다.
세상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잠들어 버린 시간.
지금 잠들지 못하는 자는 존재하지 못하는 자일까?
아무도 없는 길 위를 달려가다 보니 가물가물 눈앞이 조금씩 흐려지는 게 느껴졌다.
구구절절 필사적으로 살고 싶은 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졸음운전으로 사고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도움은 못 줄지언정 남에게 폐는 끼치지 말아야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 낯익은 파란색 표지판이 그녀의 오른편을 훅 지나갔다.
아마도 졸음쉼터 표지판이겠지. 다음에 나오는 졸음쉼터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결심한 그녀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가고, 거리가 줄어드는 표지판을 하나 둘 지나치며 쉼터에 도착했다.
평일 밤이라 그런지 졸음쉼터에는 차가 몇 대 없었다.
그녀의 은색 suv가 들어섰을 때, 당연히 그녀는 대형 화물차나 트럭 등의 차들이 빼곡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승용차가 더 많이 있는 듯싶었다.
'이상하네 이 시간에 어디 놀러 가는 사람들도 아닐 텐데. 아님 다들 나처럼 잠을 못 이루는 사람들인가.'
그녀는 속말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남들은 그녀가 말이 없다고 했지만 그녀는 굳이 말을 뱉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언제나 속으로 말들을, 감정들을, 온갖 표현들을 혼자서 조용히 묵묵하게 삼키는 편을 택했다.
오늘 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몇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 떠나간 지 벌써 1년이 되어가는 날이었다. 그녀는 주변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조용히 회사에 휴가를 내고 하루를 꼬박 집 안에서만 있었다.
모래를 그러모은 작은 소라게처럼 그녀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속 안으로 안으로 안으로 향하게 두었다.
한밤중에 갑자기 뛰쳐나오게 된 이유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한 방향으로 몰아세우다 보면 반발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녀는 일부러 차들이 적은 안쪽까지 차를 끌고 들어갔다.
집에선 나왔지만 여전히 그녀는 다른 사람의 눈엔 띄고 싶지 않았다.
겨우 차를 세우고 눈을 감은 지 십분 정도 되었을까.
'똑똑'
어디선가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뻑뻑한 눈을 뜨고 싶은 마음도 없었거니와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했던 그녀는
뒤이어 들려오는 조금 더 선명한 그리고 처음보다 아주 약간 강해진 두드림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이 밤중에 졸음쉼터에서 다른 사람 차문을 두드리는 사람이라니
순간적으로 온몸에 힘이 훅 들어갔다.
'여차하면 시동을 걸고 도망쳐야지. 차 문만 열지 않으면 여긴 안전해.'
스스로를 다독인 뒤 그녀는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 아이가 있었다. 소년인지 소녀인지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 그대로 '한 아이'가 서 있었다.
이런 곳에 아이가 혼자 서 있다니 순간 귀신인가? 하는 생각에 머리털이 쭈뼛 섰지만
사이드미러에도 비치고 두 발로 온전히 서 있는 걸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무슨 일이냐는 말조차 하지 않고 그저 그 아이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용건이 있으면 네가 먼저 말해. 내가 먼저 물어보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또다시 되뇌고 있었다.
아이는 호기롭게 낯선 사람의 문을 두드린 주제에 별다른 용건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대치상황이 벌어졌고, 그 상황을 못 견뎌한 것은 의외로 그녀였다.
"무슨 일인데? 너 혼자 여기 있는 거야? 보호자 없어? 너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거야?"
여전히 창문은 내리지 않은 상태로 그녀는 아이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그녀의 안에서 고여있던 말들은 한번 둑이 터지자 마치 그동안의 고요함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고. 그녀도 그 이상 노력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가뜩이나 흉흉한 세상에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사람이 차 창문을 두드렸다고 해서
차문을 벌컥 열어주거나 내려서 살펴줄 정도로 그녀가 이타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네가 아무런 말도 안 하고 거기 그렇게 서 있는다고 해서 내가 무언가 더 적극적으로 나설 거라고 기대하지는 말아 줬으면 해. 말은 알아듣니? 너? 난 여기까지만 할 거라고 했어."
그제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는 듯 아이가 빙긋 웃어 보였다.
그리곤 아무런 말 없이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가리켰다.
이게 뭐 하자는 건가 하는 마음과 함께 아이의 손 끝을 따라가니 그곳엔 익숙하지만 낯선 표지판이 하나 서 있었다.
늘 운전을 하며 지나치는 파란색 교통 표지판. 대문짝만 한 한글과 이곳에 어떤 시설들이 있는지 알려주는 간단한 픽토그램. 늘 봐왔던 표지판이라 생각했지만 조금 달랐다.
뻑뻑한 눈을 억지로 깜빡이며 잘 맞지 않는 초점을 맞춰보려 그녀는 미간을 찡그렸다.
표지판에는 바로 그 대문짝만 한 한글로 '울음쉼터'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