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필사 및 단상(* 민트색 글 외에는 책 내용 필사입니다)
p162
내가 발견한 것은 그보다는 어떤 모순, 혼란, 복잡성, 양가성 등이다. 나는 사람들이 명료해지기보다 함께 흔들리길 바란다. 연루되길 바란다. 선 긋고 피해자와 자신을 분리하는 대신 자신이 이미 선 안에 있던 존재임을 깨닫기를 바란다. 이것은 더 어려운 일이겠지만, 세상에 많은 좋은 것들이 그렇듯 더 보람찰 것이다.
가족에 관한 기억은 혼란스럽다.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기에 그의 나쁜 점뿐만 아니라 좋은 면까지 모두 알고 있다.
지은과 대화할 때마다 우울에 관한 가장 빛나는 통찰을 들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겪었던 가정폭력과 성인이 된 이후 겪은 데이트 폭력까지,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를 쭉 들려주던 지은은 내게 말했다.
“우울증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되면 그 이름에 매몰되는 것 같아요. 우울증 증상에 저를 맞춰보게 되고요. 이제는 그런거 다 없애버렸어요. 제 기분에 어떤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했어요. 우울증도 길어지니까 끝이 없네요. 매번 새롭게 알아가요. 사랑인줄 알았는데 아니었고, 인생 전반을 다시 해석하고 또 다른 실마리를 찾게 돼요. 결국 제일 잘 알게 되는 건 나 자신이예요. 나란 사람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니까, 앞으로 남은 인생이 모두 그런 시간일 것 같아요”
- 그동안 나도 우울증이란 것을 DSM 지표에 맞춰 생각했나보다. 누구의 인생이었다는 것을 놓치고.
칼리는 자신이 느끼는 우울감이 사실 세상에 대한 분노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부당한 세상에 대한 분노, 나에게 공감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 내가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지 명확히 언어화하지 못할 때, ‘우울증’이라고 이름 붙은 증상이 찾아왔다고 했다.
p184~ 185
분노의 정체를 명확히 밝히고 이를 말로 표현하는 과정, 이것은 혼자서 하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세상에 차고 넘치는 다른 이야기들과 내 이야기가 일치하지 않을떄는 특히 그렇다. 홀로 분노 혹은 우울을 느낄 때 우리는 나의 감정을 믿기보다 세상의 판단을 믿게 된다. 내가 미친걸까? 괴상한 걸까? 예민한 걸까? 우리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재해석할 자원은 물론, 고통 속으로 함께 들어가 공감하며 이야기를 나눌 관계가 절실하다.
- 세상에 차고 넘치는 다른 이야기들과 내 이야기가 일치하지 않는다는것…..얼마나 외로운 일인가. 나를 믿는다는 것, 다시말해 내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 내 감정이 마땅하다고 드러내는 것, 쉽지 않다. 그것보다는 상황의 파악과 타인의 감정과 타인의 생각을 잘 읽어내려고 애썼다. 그 과정이 부드럽기를 바랬고 무리 안에서 나의 자리가 티나지 않게 스며들기를 바랬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내 생각을 읽어내기가 힘들었다. 내 생각이 세상의 생각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읽어냈다고 하더라도 묻어두려했겠지. 20여년전에도 그랬었지. 내가 미친걸까. 내가 이상한 걸까. 나는 왜 이럴까. 그 시간을 나는 어떻게 지나왔나. 거슬러 가본다.
칼 리가 “영적인 갈망”이라고 표현한 것을 나는 인정, 애정, 사랑 등으로 번역하고 싶다. 연애관계는 여성이 대접받을 수 있는, 소중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몇 안되는 경험이다. 가족 안에서도 회사 안에서도 받기 힘들었던 인정의 감각을, 연애는 준다. 섹스는 ‘누군가 나를 간절히 원한다’라는 감각을 준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이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죽으면 아쉬운 존재이다. 매력과 관능은 권력처럼 휘둘러져, 마치 내가 이 관계를 통제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일시적이며 허구적인 힘이다. 세상은 젊은 여성을 팜파탈처럼 그리지만, 팜 파탈은 절대 일상의 영역에 침투할 수 없다. 팜파탈은 승진하거나, 책을 내거나, 법을 제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랑데부를 위해 어두운 침실에서 대기하는 존재이다.
- 나는 매번 섹스에 속은 것 같다. p와의 관계에서 내가 원하는 인정의 욕구는 매번 섹스로 다가왔다. 나는 괜찮아졌다고 느꼈고 괜찮다고도 생각했다. 섹스 후에도 이어지지 않는 감정은 나혼자만의 것이었다. 내가 중요한 사람이고 필요하고 괜찮은 사람임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사랑이 구원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여전히 사랑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받을 때가 아니라 줄 때,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구원의 대상이 아닌, 구원의 주체가 될 때만 사랑은 구원이 된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나뿐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꼭 인간일 필요는 없다. 동물일 수도 있고, 글쓰기와 같은 행위일 수도 있다. 사랑 받는 일은, 사랑을 주는 이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거나 곁에서 사라지면 멈춰진다. 사랑을 사랑을 주는 일은, 우리 마음 안에 타인을 향한 사랑이 남아 있는 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히 외로워지지 않는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신형철이 썼던 글을 인용하며 이번 장을 마무리하고 싶다.
이제 여기서는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이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이 부분은 참 근사한데 공감은 안되네. 함께 있을 때 견뎌졌던 때가 지나가고 시간이 지나면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은 정체된다. 변화를 가져야 함에도 변화를 가지지 못하고 여전한 없음으로 정체된다. 혹은 시너지 효과를 가진다. 떠날 때가 다가오고야 마는 것이다. 혹은 운이 좋다면 서로에게 기대어 각자의 사랑을 만들 수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