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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은낙타 Apr 29. 2023

우리 이제 그만 분분히 헤어집시다.



분분히 (紛紛히) 부사

1.  떠들썩하고 뒤숭숭하게.

2. 여럿이 한데 뒤섞여 어수선하게.

3. 소문, 의견 따위가 많아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미스터선샤인 14화 희성과 애신의 말이다.

“내기를 했으니 소원을 들어주시오. 우리 이제 그만 분분히 헤어집시다. 이제 그댄 나의, 나는 그대의 정혼자가 아니오. 이것이 내 소원이오”


극에도 딱 맞는 표현인데. 분분히. 그 말이 내내 입 끝을 맴돌았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지. 뒤숭숭할 것이고, 여럿이 한 마디씩 보탤 거고, 기억을 소환해야 할 것이고, 기록도 뒤집어야 할 것이고, 아쉬움도 슬픔도 억울함도 실망도 화남도 속상함도 허무함도 자괴감도 끝끝내 기억나지 않음도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상황과 오버랩되었다. 작년의 퇴사는 일찍이 생각하고 지나쳐왔다면 지금은 좀 다르다. 함께 일을 시작하고 도모했던 사람들과 정리를 해야 하는 시점인데 쉽지 않다. 내 필요를 해결하기를 원했고, 진심이면 그리고 그 진심이 통하는 이들과 함께라면 무엇이라도 같이 도모하는 것이 좋았다. 시작하는 것이 설렜다. 간혹 나의 능력 없음에 자괴감을 느끼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능력 없음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하고 있음을, 우리 마음대로 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서로 의견을 나눈다고 생각했던 말이라는 게 같은 단어로 나누어도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안다. 진심이라는 게 얼마나 얄팍한 단어인가. 새삼 뒤집고 뒤집고 뒤집는다. 누구는 진심이 아니던가. 우리는 진심이라는 말로 상대의 입을 막는다. 허무함이 남고 공허함이 남고 관계가 흐려진다.


흐려진 관계와 조직을 정리한다는 것을 마치 버스를 타고 목적지를 가다 스쳐 지나갈 장소처럼 살다 보면 저절로 될 것처럼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다. 함께 나눈 시간의 축적을 갈무리하는 일은 분분히 헤어지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럴 일이었다. 시작할 땐 몰랐지만 말이다.  



** 사진. 키키스미스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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