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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리나 Dec 15. 2018

21년 전, 그날을 기억하십니까?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보고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봤다. 영화 서평을 쓴 적은 별로 없지만 몇 마디 쓰고 싶어지는 영화였다. 내가 바라본 관점에서 몇 가지 포인트를 정리해 본다.


1. 영화적 티테일: 별 3개 반을 줬다. 7.0으로 표시되는 걸 보니 낙제를 면한 수준인 셈. 전체적으로 디테일이 떨어져서 툭툭 걸린다. 굳이 흠을 잡으려 한 것이 아닌데도 눈에 들어온 것 중 도드라진 거 하나만 꼽아본다. 영화가 끝나가는 부분에서 한국은행으로 여주인공을 찾아온 오빠. 부도 위기의 공장장이 나타난 순간 '이건 무슨 상황이지?' 하고 멍 했다. 주인공 오빠였다는 설정에 정말 황당. 내가 한국은행 통화정책팀 팀장이고 오빠가 제조업 종사자라면, 이미 보고서를 쓰던 초기에 가족인 오빠에게 확실히 경고를 했을 거다. 절대로 어음 받지 말라고 말이다. 아무리 영화적 설정을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현실감 제로. 

유아인 역할 역시 지나치게 과한 느낌. 그렇게 투자자를 모은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 감을 잡은 이들은 그들만의 리그로 조용히 움직였을 것이다. 연기 자체도 오버 액션이 다소 거슬렸다. 좀 더 냉혹하고 비정하고 차분했어야 맞다. 금융계 천재들치고 유아인 같은 캐릭터 없다. 


2. 여주 캐릭터 설정의 아쉬움: 팀장을 무시하고 국익보다, 국민보다 기득권 세력을 비호하는 재무국 차관에게 팀원이 마구 대든다. 이것 역시 매우 오바. 감히 팀원이 그를 대면할 자리란 거의 없다. 그리고 솔직히 하팀장이 좀 더 차갑지만 단호하게 차관에게 한 방 먹였어야 했다. 주먹 다짐이 아닌 싸늘한 독설로 말이지. 그리고 나중에 화장실에서 울고 팀원이 밖에서 위로하는 설정은 그야말로 남녀 성역할을 왜곡되게 고정하는 낡아빠진 클리셰. 경제학자이자 영화 기획자인 우석훈 박사도 지적했던 부분인데 영화 보고 나니 백퍼센트 공감이 된다. 

사실 당시 한국은행에서 여자 팀장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여자 은행원 자체를 거의 뽑지 않았으니까. 당시 여상을 졸업한 고졸 여사원 외에 대졸 여성이 공채로 한국은행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은 전체 선발인원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그렇게 들어간 인재도 통화 정책팀 요직에 갈 확률 역시 0%로 수렴하고 팀장급 되려면 나이도 훨씬 많았을 거다. 그런 걸 다 무시하고 여자로 설정했다면 훨씬 더 강인한 여전사 포스를 풍기는 게 맞았다. 얄미운 차관 말처럼 감정적으로 반응해선 안 됐다. 그리고 전직 은행원으로서도 한 마디 덧붙이자면 팀장급되면 윗 사람 이렇게 나온다고 화장실에서 울지 않는다. 눈물을 보이는 거 3개월 미만 신입사원들한테나 해당되는 이야기. 은행 입사 초기 문자 그대로 눈물젖은 밥을 먹은 적 있는 일인. 3개월 지나고선 눈물 흘린 적 없다. 


3. 과거와 현재의 반추: 은행원 시절 내가 몸담았던 은행과 수입신용장을 발급해줬던 수많은 회사들이 그때 거의 다 쓰러졌다. 난 업종을 바꿨던 터라 그 포화도 유탄도 피해갔지만, 당시 그렇게 사회를 재편한 여파가 지금 우리 세대의 자식들과 우리 세대의 노후에 고스란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 2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아니 더 나빠졌다. 지금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과 청년 실업, 자살율의 뿌리가 다 그 지점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경제학을 전공했고 잠시 은행에서 수입과 외환업무를 담당했지만 업을 바꾸면서 25년 동안 경제에 무심하게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메이저에서 확 밀려난 느낌이 들었다. 중산층은 고사하고 서민 중에서도 하층에 들어선 느낌. 위기 의식을 깨닫고 몇 해 전부터 다시 관심을 가지려 노력 중이다. 살아남으려면 다시 경제를 들여다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자가 되려는 욕심 따위는 없다. 진짜 생존을 위한 고민이다. 내 나이 52세, 평균 수명으로 본다면 아직도 살아갈 세월이 30년은 남았으니. 애들 생각해서라도 정신차려야겠다. 

마지막으로 한 줄 덧붙이자면 이런 저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한 번은 봐야 할 만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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