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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리나 Jun 30. 2024

벼랑 끝에 선 이들을 위로하고
다독이는 시를 만나다

영문학자 정경심의 영미시 앤솔로지

내가 시를 즐겨 읽었던 것이 언제였을까? 아마 사춘기 소녀시절부터가 아닐까 싶다. 1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20여년 동안은 시를 읽으며 공감하고 울컥하고 가슴 설레는 순간들이 있었다. 때로는 감성 충만해 시를 쓴다며 내 감성을 적어낸 시와 유사한 잡문도 여러 편 쓰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시와 멀어졌다. 고단한 삶을 견뎌내면서 시는 왠지 사치스럽게 여겨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시가 내게 위로를 주지 못했던 같다.  


세월이 흘러 올해 2월 <희망은 마리 새>라는 영미시 앤솔로지를 발견했다. '정경심'이라는 이름이 주는 호기심에 끌려 소개자료를 상세히 읽었다. 화제의 인물이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랐다. 그런데 소개글을 보니 저자는 영국에서 영시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 아닌가. 제대로 공부했겠구나 믿음이 갔다. 


예전에 돌아가신 영문학자 장영희 교수님의 영시 앤솔로지를 좋아해서 여러 권을 샀고, 두고두고 들춰보면서 읽었던 경험이 있었기에 모처럼 나온 영미시집이 반가워 바로 주문을 했다. 도착한 시집은 아주 예뻤고 목차에 소개된 시인들의 이름도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셰익스피어, 에밀리 브론테, 월트 휘트먼, 바이런 경, 윌리엄 워즈워드, 예이츠, 로버트 프로스트 

좋아하는 시인의 시부터 하나둘씩 들춰 읽으면서 나는 10여 년간 들여다보지 않았던 시의 세계로 다시 빠져들었다. 


이 책에 소개된 시들은 달콤한 사랑을 노래한 시들도 있지만 우리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깊이를 갖고 있다. 책의 제목으로 저자가 선정한 에밀리 디킨스의 시 <희망은 한 마리 새>가 더욱 그러했다. 


희망은 한 마리 새

               에밀리 디킨슨 (1830~1886)


‘희망’은 한 마리 새

영혼에 걸터앉아

가사 없는 노래를 부르며

결코 그치는 법이 없다네


사나운 돌풍 속에서 가장 감미롭게 들리는 노래

폭풍은 매우 혹독해야만 할 것이네

많은 이 따뜻하게 보듬는

이 작은 새를 당황시켜 주춤하게 하려면.


그 노래 나는 들었네, 혹한의 동토에서도

아주 낯선 바다 위에서도.

하지만 아무리 절박하여도 결코

내게 빵 부스러기 하나 요청한 적 없었다네.


인생에서 희망이란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하게 만들어준 시 원문도 좋았지만 저자의 해설을 읽고 나니 울림이 더욱 깊어졌다. 


저는 예전에 사람의 인성 중에 가장 고귀한 자질이 무엇일까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뱃속에 생명이 잉태되었음을 알고 난 후 시작한 성찰이었기에 참으로 진지했지요. 결론은 절대로 굴하지 않으며 희망을 놓지 않는 긍정의 마음이었습니다. 요즘 친구들 말처럼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지요. 어느 누구라도 세상의 시련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임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경우라도 씩씩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 긍정의 마음이면 두려울 것이 없으리라 더 믿게 되었지요.

-‘희망은 한 마리 새’ 해설 중에서


문득 어떤 마음으로 저자가 시를 고르고 해설을 썼는지 궁금해졌다. 그 답은 저자 서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서문을 읽고 나서  이 책이 어떤 배경에서 나오게 된지를 알았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시가 주는 위로가 무엇인지 나도 알것 같았다. 


영미문학을 공부한 지 44년 차입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강단을 떠나게 되었고, 깊은 시련의 시간에 제 천직이 무엇인지 거의 잊을 뻔했습니다. 어느 날 지독히도 힘들었던 날, 영문으로 된 시집 한 권이 제게 왔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영미시의 대중화를 위해 애써보겠다고 한 다짐이 문득 되살아나서 며칠 묵혀둔 책을 꺼내보았습니다. 외국어로 된 시를 소개하려면 무엇보다 번역이 중요할 텐데 사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텍스트를 주욱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형언할 수 없는 평정심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영미시를 읽는 동안만큼은 잡생각이 끼어들지 않더군요. 다 소진되어 버린 줄 알았던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전 없이 단숨에 다섯 편의 시를 번역하고 해설도 붙여보았습니다. 그 시간이 어찌 지나갔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몰입했습니다..

-4쪽, 서문 중에서


이후로 항상 거실의 작은 책상에 시집을 올려놓고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고 싶을 때마다 한두편씩 음미하면 읽곤 했다.  시 한편 한편이 주는 울림에 먹먹해서 오랫동안 리뷰를 미루다가 수개월이 지나 이제야 서평을 쓴다. 길게는 수백년의 시간, 짧게는 백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가슴에 와닿는 시들이 어쩜 그리 많은지. 저자가 시들을 읽고 번역하며 위로를 받았듯 나도 시 한편 한편에서 위로를 받는다. 

시는 우리가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다고 느낄 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주위를 차분하게 둘러볼 힘을 갖게 만드는 것 같다. 마음의 상처를 받고 힘들다고 느낄 때 시집을 꺼내 한 편 읽어보는 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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