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을 읽고
대학원 들어가서 처음 배운 개념이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한, 헤겔을 인용한 지젝의 이론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지나치게 아픈 상처는 온전한 글로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토록 아픈 상처를 겪어낸 사람은 온전한 정신일 수 없으니까. 그가 증언을 위해 입술을 뗄 때 이미 그 모든 몸짓은 상처투성이, 걸어가는 걸음은 절뚝이는 걸음이라는 것. 따라서 내용만큼이나 형식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거의 완벽하다. 커트 보니것은 비극을 기록하는 완벽한 방식을 찾아냈다. 드레스덴에서 있었던 믿기 어려운 수준의 참사와 그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 그 트라우마적 기억은 뒤죽박죽된 시간성 속에서 생동한다. 트라팔마도어라는 외계 행성과 4차원에 해당하는 그들의 세상을 보는 눈이, 이 사건을 서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모든 시간을 한 번에 들여다보는 그들의 시각에서 '원인'과 '결과'란 무의미하다. 모든 일은 그저 일어날 뿐, '왜'라는 질문은 유효하지 않다.
고통을 겪을 때 인간이 지극히 인간적이게도 자연스럽게 묻는 질문은 언제나 '왜?'이다. 왜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왜 지금. 그러나 모든 비극의 공통점은 마땅한 이유란 없다는 것이고, 사실 그 불가해함 자체가 바로 비극인 것이기도 하다. 드레스덴의 그 수많은 사람들은 왜 그렇게 죽어야만 했을까. 드레스덴에 무차별 폭격을 가한 그들은 왜 그렇게 했던 걸일까.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나버린 셈인 트라팔마도어인의 시각에서는 단지, '그저 그러했던 것'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다. 비극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은 사실 그것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식이 황당하기보다 차라리 무참하게 슬픈 것은, 이런 시각이야말로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그들의 죽음을 납득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작가의 심정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오직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시간 속에서만, 존재는 생성하고 소멸한다. 그러한 흐름이 없이 한 곳에 펼쳐져있는 동그란 시간 속에서는 죽음이란 없다. 어느 한 시점에서 그들은 죽지만, 죽음 이전의 다른 어떤 시간 속에서는 언제나 살아있기 때문이다. 커트 보니것은 이와 같은 시간 개념을 통해 전쟁의 피해로 죽음을 맞이한 안타까운 생명들을 되살려낸다. 부산에 사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싣듯, 그들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 그들이 살아 숨쉬는 때로 이동하는 시간 열차를 타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인간은 언제나 고통과 싸우고, 비극에 맞서고, 불가해함과 무의미함과의 사투를 벌인다. 오직 그것만이 인간 존재의 운명인 것처럼. '운명'이라는 개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지만, 생각해보면 운명이라는 단어를 인간이 만들어내고 사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세상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거나 바꿀 수 있는 것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이 훨씬 많은 게 사실이다. 그 해명되지 않는 어떤 것을 인간은 결국 '운명'이라 명명해낸다. '운'이나 '팔자', '우연' 등등이 전부 같은 것의 다른 이름들이리라. 커트 보니것이 드레스덴에서 살아남고, 그 뒤로도 쭉 삶을 이어가며 마침내 <제5도살장>을 집필한 것 역시 모두 '운명'이라 부를 수 있다면, 운명이란 야속하거나 감사한 것일지언정 어찌 허망한 것이겠는가.
<제5도살장>의 방식으로 지구상의 모든 비극과 참사를 써내고 싶을 만큼, 이 책은 '마땅한 애도의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나 기어코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되고마는, 그것이 바로 이 가엾은 인류가 속해있는 운명일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