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파리 시간으로 13일 23시 43분
<로비(2020, 하인츠 에미그홀츠)>는 아주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한 남자가 러닝타임 내내 도시 곳곳의 아파트 1층 로비에 앉아서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것이 플롯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자 출연진의 전부인) 남자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고 하면서 주로 죽음과 시간에 관한 이야기들을 끝없이 떠드는데, 사실상 그의 말들은 매우 심각하지만 궤변이나 다름없으며 특별한 핵심을 담고 있지도 않다. 그것을 깨달은 다음에는 마음 편히 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단지 지루한 영화로만 치부해서는 결코 안 되는데, 촬영 방식의 디테일들에서 놀랄만한 새로운 시도들이 빛나기 때문이다. 남자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한시도 쉬지 않고 말을 하고, 그 음성은 조금도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영상은 계속해서 바뀐다. 말하는 남자의 모습이 피사체라는 것은 변하지 않지만, 카메라의 구도가 계속 변하고, 건물 밖의 명암이 변하고(영화 말미에 가면 그가 현재 이 촬영을 며칠에 걸쳐서 하는 중이라고 직접 말한다), 남자가 위치한 건물이 바뀌고, 그가 앉아있는 의자가 바뀌고, 종종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고정된 카메라로 찍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지만, 말도 안 되게 비스듬한 각도로 찍기도 하고, 온전한 수평으로 찍기도 한다. 그렇게 화면이 마구 변하는 동안 한 시간이 넘도록 쉼 없이 이어지는 남자의 음성에는 흔들림이 없다. 이러한 화면과 오디오의 조합은 그래서 아주 기묘한 느낌을 준다. 남자는 성격이 아주 고약한 편인데, 듣기 싫으면 이쯤에서 영화관을 나가라고 몇 차례 말하기도 한다. 그는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어긋나 있는 관객과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으려 하고, 또한 동시에 실패한다. 실험적인 영화들이 대체로 그렇듯, 영화라는 매체 혹은 장르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보통의 극영화들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꾸며진 세계를 필름에 담아(물론 지금은 엄밀히 따지면 ‘필름’에 담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때 감독이 말하고 싶은 바를 배우들이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말 그대로 단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것일 뿐이다. 그 장면이 관객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완전히 단절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이다. <로비>의 남자는 본인이 곧 죽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언급하면서, 누가 될지 모르는 관객이 지금 자신이 담긴 영상을 보고 있을 때 자신이 아직 살아있는지 이미 죽고 없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어머, 정말 그렇네, 하고 진지하게 그 문제를 곱씹을 때쯤이면 애초에 저 남자는 고용된 배우이고 저 남자의 멘트들 역시 대본에 불과하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 내내 끊이지 않는 음성과 수시로 전환되는 화면이 계속해서 서로 어긋나듯이, 감독이 영화에 담는 것, 그리고 관객이 영화를 통해 보는 것은 필연적으로 서로 어긋난다. 그리고 감독이 영화에 어떤 세계를 담든지 간에 그 세계는 그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세계이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남자의 말소리처럼 감독은 하나의 온전한 스토리를 (통상) 두 시간 분량의 영화 한 편에 담지만, 영화관에 늦게 들어오는 관객, 중간에 졸거나 딴 생각을 하는 관객, 모종의 이유로 내용을 오해하는 관객, 개봉 당시에 보는 관객과 개봉 후 수 년 뒤에 관람하는 관객 등, 영화 속에서 수시로 바뀌는 화면처럼 그 영화는 저마다에게 다르게 보여지는 것이다.
이쯤에서 추리소설의 거장인 애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라는 단편소설을 예로 설명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을 (정말 아주 엄청나게) 간단히 소개하겠다. 한 왕비가 중요한 편지를 D에게 도둑맞았다. D는 왕비의 약점인 이 편지를 가지고 왕비를 협박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 왕비는 G에게 편지를 찾아올 것을 지시한다. G가 자신의 능력으로 편지를 찾지 못해 고용한 탐정이 결국 D의 집에서 편지를 찾아내고, 그는 D 몰래 그 편지를 다른 편지와 바꿔치기해서 가져온다. 여기서 핵심은 편지가 무사히 다시 왕비에게로 돌아가 이제 왕비는 안전하지만, D는 아직까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깨닫게 되기 전까지 D는 여전히 자신이 왕비의 거대한 약점을 틀어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답게 행동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게 바로 라캉이 생각한 ‘욕망’의 정체다. 욕망이란, 욕망의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것을 가졌다고 믿는 일종의 착각이다. 다시 말해 욕망의 대상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블로그에서 훌륭한 예시를 봤는데 이를 조금 활용해서 적어보자면, 마치 누군가 짝퉁 명품가방을 진품인 줄 알고 구입했는데 본인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경우, 그 사람의 욕망의 대상인 ‘명품가방’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욕망으로서 작동하면서 자신의 명품가방을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한다고 믿으며 당당하게 행동하도록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대충 이것이 소설의 예시를 통해 라캉이 정의한 ‘욕망’이다.
이 개념을 작품의 창작과 수용에 적용해본다면, <로비>가 사용하고 있는 촬영 및 편집방식이 그 자체로 비유하고 있듯이 창작자와 수용자는 작품을 사이에 두고 영원히 서로 어긋나지만, 창작자는 그냥 자신의 편지가 수용자에게 잘 전달되겠거니 하면서 편지를 작성하는 것이고, 수용자는 내가 지금 창작자가 쓴 편지를 잘 읽고 있는 것이겠거니 하면서 읽음으로써 서로 합의된 속고 속임을 주고받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당연히 지금 이 글을 연재 중인 나와 여러분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나는, 물론 오늘 같은 경우는 더더욱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편지를 적어 여러분에게 보내고, 여러분은 그보다 더 이게 대체 다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어쨌든 각자의 방식대로 내 글을 소화할 것이다. 이때 우리 사이에 위치한 내 글이라는 실제 대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나는 뭔가를 써서 누군가에게 읽히고 있다는 믿음, 여러분은 나로부터 무언가를 전달받고 있다는 믿음으로 이 묘한 어긋남의 관계를 지속해나간다는 게 핵심이라고 하겠다.
영화가 끝나자 운 좋게도 독일에 계신 감독님과 GV(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더 운 좋게도 내 질문이 두 개나 뽑혀서 감독님의 대답을 직접 듣기도 했다. 하나는 수시로 변하는 카메라 위치에 비해 1시간이 넘도록 음성은 흔들림 없이 이어지게끔 촬영하기가 엄청나게 힘들었을 것 같은데 어떤 방식을 사용했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간 꾸준히 건축영화를 찍어온 감독답게 “영화란 일종의 건축이다”라는 말을 남긴 바 있는데 이 영화에서 계속 언급되는 ‘죽음’ 역시 일종의 건축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통역을 통해 내 질문을 들은 감독님은 뭔가 이래저래 설명을 하긴 했는데 그다지 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렇게 또 어긋났고, 나는 아무튼 그냥 감독과 질의응답을 했다는 알맹이 없는 욕망을 만족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