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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 Jul 20. 2021

잘 노는 아이

놀 줄 모르는 아빠

32도를 훌쩍 넘는 무더위에 델타 변이까지 기승을 부리는 따분한 여름이다. 동네 근처에 계곡이 있어 주말이면 아이와 함께 물놀이를 즐길 수 있어 다행이다. 주말이면 우리 부부는 더위와 사람을 피해 관악산 아래 계곡엘 간다. 아이와 함께 도롱뇽도 잡고 버들치도 열심히 좇아 잡는다. 남편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아이보다 더 열심히 물놀이를 즐긴다.


관악산 계곡에서 만난 도농룡 (놓아 주었다.)


'이번 주말에도 조카랑 아주 시원하게 물놀이했네'


물놀이 사진을 흐뭇하게 보며 여동생이 묻는다. ​


'응, 아주 자기 세상 만났지 뭐야. 놀 땐 엄마 아빠 안 찾아서 그게 제일 좋아'


'당연하지. 애들은 자연에서 놀게 해 주는 게 제일 좋지'


잘 노는 아이

​EBS <놀이의 반란>에서 아이의 놀이를 주제로 실험을 했다. 아이들을 세 집단으로 나뉘어서 첫 번째 그룹은 스스로 놀잇감을 고르게 했고, 두 번째 그룹에게는 어른이 '이걸 가지고 놀아보면 어때?' 라면서 유도를 했다. 세 번째 그룹은 아예 '이걸 가지고 놀아보라'라고 놀잇감을 지정하게 해 줬다. 그 결과, 첫 번째 그룹만이 놀이 시간이 끝나고도 계속 놀이를 유지했다. ​


이 실험은 진정한 놀이가 누구의 권유나 개입 없이,어떤 계획이나 목적성 없이 오직 현실에만 충실하여 놀이하는 것인데 남편이 말하는 5살 때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정신없이 논다'라는 몰입과 일맥 상통한다. 전문가들은 아이들이 몰입을 경험하기에는 '자연' 만한 곳이 없다고 말한다.


반복적으로 물과 흙을 퍼다 나른다. 어떠한 목적이나 이유는 없다. 짧은 막대기로 해보다가 잘 안되면 궁리를 해서 더 큰 막대기를 구해온다. 잘 안되면 '아하!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스스로 깨닫게 된다. 흔들리는 바위, 돌을 내딛으며 위험한 곳을 체크한다. '이곳은 위험하고 여길 밟으면 안전하지'하고 성취감을 얻는다.  


동생과 한창 낄낄거리며 대화하다 갑자기 생각이 떠올라서 물었다.


‘근데 우리 어릴 때 아빠랑 물놀이했던 적 있나?'

‘없지. 어? 그러고 보니 정말 없네?'


놀 줄 모르는 아빠​

문득 생각해보니 우리 세 자매는 정말로 아빠와 물놀이했던 기억이 없다. 물놀이는 고사하고 곤충 채집을 하거나 개구리를 잡거나 한 적이 없다. 그쪽으로는 아빠보단 엄마가 더 적합했다.


그렇다고 아빠가 세 딸에게 괴팍한 편은 아니었다. 무뚝뚝해서 다정하진 아니었지만 어렸을 적 친목계, 친가, 외가 친척들과 바다로 산으로 계곡으로 자주 쏘다녔다. 그런데 왜 우린 아빠랑 신나게 놀아본 기억이 없을까?


세 딸 중 둘째인 나하고만 놀아 본 추억이 없나 순간 의심하긴 했지만 동생도 없단다. ​


'아빠가 나만 튜브 안 밀어 준거 아니지?'

'(웃으며) 아니라니까.

아빠는 놀기보단 늘 술을 드셨지'


맞다. 아빠는 자주 술을 드셨다.

15년쯤 전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할 때 즈음 입에 술 한 방울 대지 않겠노라 다짐한 이후 여태껏 본인과의 약속을 지키고 계시지만 그 전에는 술을 참 많이도 드셨다.


매일 한 병씩 얼큰하게 취하고 와서는 까끌거리는 수염을 비비는걸 좋아하셨다. 경상도 사나이라서 말수가 없는 아빠였지만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르면 세 딸을 퍽 예뻐하셨다.

'생각해보니 우리 아빠는 정말 놀 줄 모르네'

'응. 요즘 엄마랑 둘이 여행 다니면 아주 황당하다니까' ​


무슨 말인가 들어보니 요즘 아빠와 엄마가 당일치기 여행 다니신다고 했다. 한 번은 강원도 원주를 구경 간다고 두 분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는데, 동생 말로는 저녁 즈음 집에 오셔서 물 한잔 못 마신 사람들처럼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고.


엉덩이 붙일 새 없이 극기훈련처럼 빡빡하게 동선을 짠 게 문제였다. 찬찬히 구경 좀 하고 카페도 들리고 하지 그랬냐고 동생이 핀잔을 주니 엄마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에잇, 아빠가 놀 줄 몰라.

난 교회 사람들하고 다니는 게 편하다. 얘'


못 놀아 본 아이

나는 가끔 어릴적 아빠의 모습을 떠올려 보곤 한다. 앨범 속 흑백 사진에 찍힌 검은 모자를 쓴 작은 남자아이가 보인다. 눈매가 곱고 입술은 야무지고 피부가 하얀 남자아이다.  

경상북도 대구에서 세 아들 중 맏형으로 태어난 장난기 많고 씩씩한 아이. 그러다 아이는 가족 생계를 위해 학교 가기 전, 새벽에 부지런히 일어나 동네를 돌며 신문지를 돌렸다.

겨울 찬 바람에 코를 훌쩍이며 온기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와 밥 한 숟갈 뜨려고 하면 재수 없게 콧물을 훌쩍인다며 아버지가 아이에게 따귀를 날렸다. 아이는 할 수 없이 부엌 마루에 숨어서 울며 밥을 삼켰다. 그 이후로도 계속된 아버지의 험한 매질 때문에 아이는 속절없이 집을 뛰쳐 나왔다. 경기도 성남 판자촌에서 터를 잡아 홀로 살아남는 법을 알아야 했다.


다 큰 성인이 되어 결혼을 했는데 잘 다니던 자전거 회사가 난데없이 부도가 난 바람에  백수가 되었다. 청년 때 모은 전 재산을 부모 형제에게 다 주었기에 갓 백일 된 둘째 아이를 안고 속앓이를 해야했다. 무일푼으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가까스로 성공해 가족을 건사했다.


아빠는 지금은 월세 받는 황금 노년을 보내고 계시지만 나는 아빠를 볼때면 노는 것보다 쉴 곳이 필요했던 그 어린 아이가 자주 겹쳐 보인다.


만약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래서 내가 이 아이를 만날 수만 있다면. 누구보다 따뜻하게 보듬어 주겠노라. 남보다 못한 부모 때문에 힘든 아이를. 나라도 힘껏 사랑해주겠노라.


곤히 잠든 5살 아들을 보며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아빠는 이런 이유로 노는 법을 잘 모르는 것 아닐까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해진다. 지난 번 이사온 집 근처 계곡엘 엄마, 아빠와 함께 갔는데 구경 하시느라 사라진 엄마와 달리 아빠는 발만 담그시곤 두리번 두리번 사람 구경만 할 뿐이었다. 맛있는 점심 저녁 식사, 오로지 먹는 일에만 흥미가 있으셨다.


다시 동생에게 말했다.

"코로나 좀 잠잠해지면 아빠랑 다시 한번 계곡에서 신나게 놀아야겠다. 도롱뇽도 잡고 버들치도 잡고 말이야."


올 여름 더위가 가시기 전에, 부지런히 아빠와 못다한 놀이를 해보자고 다짐했다.


매미가 참 우렁차게도 우는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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