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거할까 허용할까
어느 곳이나 물을 흐리는 한 마리의 미꾸라지는 존재한다. 개인에게 획일성이나 통일성을 강조하는 집단일수록 미꾸라지의 행동은 두드러진다. 진흙탕이 깊을수록, 미꾸라지가 깊숙이 박혀 있을수록, 미꾸라지의 몸부림은 더 큰 흙탕물의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우리는 그것을 미꾸라지의 탓으로 돌린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맑은 물을 왜 몸부림쳐서 더럽게 만드냐고 볼멘소리 한다.
흙탕물 때문에 물이 흐려지면 왜 문제일까.
보기에 지저분해 보이니까 그럴까.
흙탕물은 미꾸라지가 살고 있는 환경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 현상이다.
그저 물밖에서 바라보는 제삼자의 시선에 거슬릴 뿐이다.
뿌연 흙탕물은 시간이 지나면 금세 가라앉는다. 진흙탕의 생태계는 그것이 정상이다. 물과 흙, 미생물, 생물이 이루는 환경은 조화로이 유지된다.
물을 흐린다고 미꾸라지를 제거하면, 진흙탕이 더럽다고 걷어내면, 그곳은 더 이상 본래의 시냇물이 아니다.
인간은 안정을 추구한다. 변화는 두려워한다. 그것이 생존 방식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면 더욱 그러한다. 우리 생태계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생각한다. 아마 조선시대까지는 그랬을지도.
아니 일제시대까지도 그랬을지도.
아니 민주화 시기 전까지는 그랬을지도.
아니 아마도 앞으로 5천 년 동안 그럴지도.
5천 년 전 고조선 건국 이래 한민족의 생존 방식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터이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지 않았는가.
이제는 그 생존 방식이 과연 적합한가 고민해야 한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고 해서 생태계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곳은 병든 환경이다. 이를 회복시키려면 미꾸라지가 가만히 있도록 묶어두거나 맑은 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물과 진흙의 상태를 변화시켜야 한다.
미꾸라지가 마음껏 헤엄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