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게 된다. 밍기적대며 5분 후 알람을 한 번 더 듣고 일어나서 이 닦고 옷 입고 선식을 타 먹고 나서면 딱 그 시간이다.
서있는 자리오른편에는 편의점이 하나 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우리 동네 핫 플레이스. 화요일 하교 후엔 동네 엄마들과 들러서 아이들 간식을 사 먹이고 태권도 학원으로 집으로 흩어지곤 하는 곳이다. 핫플 편의점은 아직 밤처럼 어두운 동네에서 혼자서 환하게 빛나고 있다. 멍하게 불빛을 쳐다보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짜 24시간 열려있는 거구나..."
예전에 편의점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었다. <불편한 편의점>이었던가. 뻔한 듯한 반전 매력을 가진 뻔한 듯한 이야기 같지만 읽으면서 이거, 엄청 인기 끌겠다 생각했는데 역시 그랬다. 나에게 편의점은 좀 불편한 곳이다. 일단 아이스크림이 너무 비싸고 아이들과 오며 가며 참새 방앗간처럼 들르다 보면 한 달 후 돈을 지불할 때 내가 편의점에서 이 정도로 돈을 썼다고? 하고 놀라게 된다. 한 마디로 가랑비에 옷 젖는 곳이랄까... 하지만 저렇게 어둠 속에 빛나는 저 빛에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이상하게 따뜻해서 이상하게 안심이 되고 위로를 받는 것처럼 느낀다. 24시간 열려있다는 기분 탓일까? 아무튼 겁나게 친근한 거다. 해외여행을 갔을 때 숙소로 들어가는 길 들르던 곳은 늘 편의점이었던 것처럼... 저곳은 역시 사람들이 바라 마지않는 훈훈한 휴먼 스토리의 배경이 되기에 더할 나위 없어 보인다. 횡단보도에 멈춰 서면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지는데, 그 사이에 이렇게 별별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건 그렇고 오늘 발견 한 것: 새벽에 차를 타고 가다가 신호에 걸리면 대부분 횡단보도 바로 앞에 멈춰 서게 된다.
아마 차가 별로 없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별 건 아니지만 이게 기분이 되게 좋다. 낮이었다면 아 신짤(신호짤림....)이다...라고 애통했을 일인데 새벽에는 다르다. 어떻게든 꼬리 물고 빨리 지나가려는 마음 따위는 들지 않는다. 멀리서부터 제법 여유롭게 브레이크를 건다. 가진 자의 여유라고나 할까. 길 중간에 멈추는 것보다 횡단보도 앞에서, 제일 앞에서 멈추는 것 정도로도 뭔가 주도권을 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을 알았다. 헐렁한 도로를 느긋하게 달리는 건 정말이지 즐거운 경험이다.
그리고 또 발견한 것. 오늘은 사람을 발견했다.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아주머니, 짐을 들고 가는 아저씨를 봤다. 그리고 수영장 건물 1층 주차장에서 물건이 잔뜩 든 카트를 옮기는 젊은 남자도 봤다. 갓생러들이 따로 없다. 새벽에 당연한 듯 자기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약간 뭉클하기도 하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치솟는다. 대단히 진부한 클리셰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쩔 수 있다...
수업 시간에는 발차기를 많이 했다. 상체는 바닥에 하체는 물에 둔 채 엎드려서, 다리를 한쪽씩 높이 들어 올리고 1분씩 버틴다. 번갈아서 교차, 그걸 여러 번. 점점 빨리.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의 근육을 느낀다. 그러다 옆옆 보라 회원님의 말을 들었다.
"양쪽 골반 뼈를 바닥에 찍어 누르는 느낌으로 다리를 드는 거야"
주워들은 대로 그렇게 했더니 오.....! 느낌이 확 온다. 엉뚱하게 종아리 근육만 키울 게 아니라면 바로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였다. 다리를 교차할 때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다. 기뻐서 환호가 나온다.
뼈를 내리꽂으라고 나직하게 말했던 보라님은 내가 첫 시간부터 주시하던 분이다. 보라색 수영복을 입은 그분은 친구와 함께 왔는데 친구는 수영이 처음이고 보라님은 7년 전에 오리발 단계까지 다 했지만 다시 시작하는 거라고 했다. 친구분은 매우 사교적인 듯 까르르 잘 웃는 분인데 첫시간에 여기저기 사람들한테 말을 걸고 있었다. 친구 옆에서 7년 전 수영 배운 얘기를 술술 하던 보라님이 문득, 복화술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셨다. "야... 니가 처음이라서 모르나 본데, 이런데 와서 자꾸 말 걸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래서 니가 초보인 거야. 나정도 되면 조용히 있어야 할 때를 알지"
고수다. 보라님은 고수야...!
첫 시간 보라님의 매력에 빠진 나는 이후 가능하면 그분 주위에서 수영을 하려고 신경을 쓴다. 재미있는 사람 옆에 있으면 재미있다는 걸 알지. 그리고 그 덕분에 이런 꿀팁을 얻은 것이다. 아. 기쁘다.이 자리를 빌려 보라님께 말하고 싶다. 감사합니다.
수영을 마치고 나오면서 한 장씩 찍어두는 시계 사진. 아직 7시인데 뭔가를 하나 했다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