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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Oct 31. 2021

#54. 도시의 밤을 걷다가

마음의 적을 찾아서

해가 짧아진 오후 일곱 시. 부지런히 밤 산책에 나선다.  지금이 아니면 또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이 계절의 밤바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오피스텔은 술집과 식당과 사무실들이 즐비한 거리에 맥락 없이 서 있다. 밤이면 거리마다 유흥이 엎질러지는 이곳은 ‘주거’라는 말만큼이나 ‘산책’이라는 말이 안 어울리는 동네이지만, 의외로, 정말이지 의외로 걷기에 나쁘지 않다. 술 취한 사람들, 피로한 직장인들, 욕망으로 가득 찬 시선으로 흘깃거리는 남녀들을 지나쳐 걷는다.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에 다다르면 육 차선 도로가 펼쳐진다. 도로의 양 옆으로 우거진 거대한 빌딩 숲 속으로 나는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밤바람은 딱 기분 좋을 만큼 차갑고, 가로수 잎사귀들은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초록을 잃어간다. 도시의 소음은 시끄럽기보다 안전하다. 언젠가부터 거리를 걸을 때 음악을 듣지 않는다. 세상을 차단하는 것보다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더 필요해서다. 멀리 가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손바닥만 한 파리에서는 아무리 멀어도 발길로 닿지 못하는 곳이 없었는데, 서울은 조금만 걸어도 금세 지친다. 광활한 이 도시에 비해 내 보폭은 턱없이 작아서, 걸어도 걸어도 출발지점에서 좀체 멀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도시라는 게 실은 살아있는 거대한 유기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한 발짝 전진할 때마다, 도시는 슬그머니 반 발짝 뒷걸음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번 외출이 이렇게까지 지칠 수가 없다.


아닌 게 아니라 밤의 도시는 정말로 하나의 생명체 같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규칙적으로 작동하는 내 몸의 기관들처럼, 걷다 보면 도시도 약속한 듯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복잡하게 교차된 도로 위로 붉은 전조등이 혈류처럼 흐르고, 사람들은 정해진 신호에 맞춰 길을 건넌다. 가로등은 언제나 같은 시간에 도시를 밝히고, 집집마다 켜진 무질서한 불빛도 밤이 깊으면 규칙처럼 하나 둘 점멸한다. 보이지 않는 내 발아래에는 일정한 유속으로 오물이 흐를 것이고, 지하철은 지금 이 순간도 같은 구간을 빙빙 돌고 있을 것이다. 그럼 쉼 없이 움직이는 이 생명체의 몸속에서 나는 무엇일까 생각한다. 도시의 혈관을 빙글빙글 떠도는 헤모글로빈 1 쯤 되려나 생각하다가, 그럼 나는 이렇게 빙글빙글 돌아서 어디로 가고 있나 생각한다.


호박색 전등이 환하게 켜진 카페 앞을 지나, 셔터가 내려진 안경점을 지나쳐 걷는다. 걸으며 마음의 적에 대해 생각한다. 7년 만에 돌아온 서울에서 내내 힘들었다. 봄은 괴로웠고 여름은 끔찍했다. 어디에도 적을 둘 곳이 없었다. 외출을 할 때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낡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기하학적인 이 도시는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같았고, 나는 햇볕에 색이 다 날아가버린 오래된 풍경화 같았다. 바람이 선선해지고 나서야 조금씩 이 도시도, 내 마음도 편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 이제야 아주 조금씩 도시에 녹아들고 있다. 지금은 나도 회사 사람들과 비슷한 옷을 사 입고, 인기 많은 쇼프로를 챙겨보고, 요즘 유행한다는 음식도 배달시켜 먹는다. 출근길의 군중들도 익숙하고, 정신없는 이 동네에도 매일 가는 헬스장이 생기고 자주 가는 동네 슈퍼도 생겼다.


파리를 떠나올 때, 이제는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요즘은 이 ‘정착’이라는 말이 물리적인 의미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마음 둘 곳이 없으면, 이방인의 생활도 끝나지 않는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나는 아직 낯선 도시를 빙글빙글 떠돌며 마음의 적을 찾고 있다. 그것이 사람이든, 장소든, 꿈이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 한 때 마음 둘 곳을 찾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땐 그것이, 그 사람이 영원히 내게 집이 되어줄 줄 알았다. 그럼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서 마음의 적을 찾을 수 있을까.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는 단 한 사람이 있고, 좋아하는 밥집과 자주 가는 책방이 있고, 닿을 수 있는 작은 꿈이 생기면, 그땐 정착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음악 없이 걸으며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자주 가는 슈퍼에 들러 사과 한 봉지를 사고서 집으로 향한다. 어제와 다르게 밤기운이 꽤 쌀쌀해졌다. 가을은 짧고, 이 빌딩 숲을 산책할 수 있는 밤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아쉬워, 더 오래 걷고 싶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늦춰 본다. 도시가 슬그머니 반 발짝 뒷걸음 쳐주기를 기대하면서. 도시를 천천히 걷는 밤. 처음으로 도시의 불빛이 다정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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