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나무 Oct 10. 2021

#53. 너와 나의 연결고리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여중, 여고, 여대, 여자 대학원을 나온 나는 정말 많은 여자들을 만났다. 만났다는 말로는 부족한지도 모르겠다. 여자들에게만 둘러싸여 살아왔으니까. 내가 살아온 삶의 바운더리는 좁아도, 내가 목격하고 들은 여자들의 경험에는 테두리가 없다. 여자들은 얼굴도, 체형도, 성격도, 세대도, 출신도, 사회계층도 제각각이지만, 나는 자주 그들에게서 ‘나'의 조각을 발견하곤 한다. 저 사람이 느끼는 게 무엇인지 너무나 알 것 같은 기분. 저 사람이 과거나 현재, 혹은 미래의 나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같은 감각과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 독자들이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를 사랑했던 이유도 비슷할 것 같다. 냅의 글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냅이 살아생전 남긴 에세이들은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그녀를 담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으며, 고독을 즐기며, 사교적이지 못하지만 자신을 이해하는 벗이 있었고, 사랑하는 가족과 반려견이 있었던 냅의 삶 속에 과거의 혹은 현재의 내가 있었다. 어쩌면 미래 어느 시점의 내가 있는 것도 같았다. 혼자 일하고, 혼자 살아갈지도 모를 나의 사십 대, 혹은 오십 대가 이런 모습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냅은 여성에게 내면화된 억압들을 떨치려 했고, 고독과 마주했으며, 중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치열하게 성찰했다. 그리고 사랑했다. 부모님을 회상하고 그리워하고, 쌍둥이 언니와 조카를 아끼고, 반려견에게 모든 애정을 쏟고, 친구와 고요하고 긴 산책을 즐겼다.


<명랑한 은둔자> 연결고리 같은 책이었다.  곁에 있는 많은 여자들을 주렁주렁 떠올리게 했다. 내게 냅을 소개해주었던 F 언니, 파리에서 이방인 생활을 계속 하는 P, 남편을 한국에 두고 혈혈단신 네덜란드로 떠난 A, 몬트리올에 홀로 남겨진 H, 나의 단짝 J, 나의 친언니 S... 냅의  속에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냅은 거식증과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웠다. '중독' 마취제와 같아서, 견딜  없는  삶을 회피할  있게 도와준다. 냅은  중독 속에 내재된 여성들의 결핍된 욕구를 탐구하고, 거기서 벗어났을  맛본 해방감을 들려준다. 음식에 대한 강박, 체중에 대한 집착, 자신에 대한 통제력과 자기 증명의 욕구... 나와 나의 여자들도 결코 모르지 않는 이야기였다. 냅의 성찰은 '출구를 가리키는 표시등'처럼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향을 알려주는  같았다. 이쪽으로 가보자고, 나는 나의 여자들에게 소리치고 싶어졌다.


책과 무관하게 엄마가 주렁주렁 걸려올 때도 있었다. 무심코 펼친 책날개를 보고 냅이 엄마와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냅이 마흔두 살에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을 때는 2002년이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그 해에, 엄마도 겨우 마흔둘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냅의 젊고 거침없고 재기 발랄한 문체에서, 같은 나이의 엄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날 오후 언니를 만나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엄마의 최선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실상 아빠가 부재했던 그 시절, 엄마는 겨우 마흔둘이었다고. 언니, 나, 동생까지 3인분의 인생을 혼자서 짊어진 젊은 여자에게 최선은 거기까지였다고. 우리에게 결핍과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다면, 그건 성인이 된 우리의 몫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날의 대화도 모두 냅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연휴가 끝나는 날 나는 F언니에게 책을 추천해줘서 고맙다는 문자를 보냈다. 우리는 간단한 명절 인사를 나누었다. 책에 관해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책 속에서 F언니가 발견한 자신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건 F언니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연결고리처럼 떠오른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파리에 있는 P와, 네덜란드에 있는 A와, 몬트리올에 있는 H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시시콜콜한 내용들이었다. 어떤 편지에는 고독한 생활의 안부를 물었고, 또 어떤 편지에는 보고 싶다고 그립다고 썼다. 나는 편지와 함께 냅의 책을 소포로 부쳤다. 책 속에서 자신의 조각을 발견하기를 바라면서. 그래서 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연결고리에 또 다른 연대가 주렁주렁 걸려오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52. 느림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아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