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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Apr 10. 2022

창밖은 아침입니다

2022년 3월 10일

당신에게


캄캄한 새벽에 깨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차를 끓이는 일입니다. 이곳에 온 이후로 자주 배앓이를 합니다. 아마도 물 때문이겠지요. 가급적 빈 속엔 차가운 음료보다는 따뜻한 차를 마시려고 합니다. 이곳의 수질은 좋지 않습니다. 지금은 괜찮지만, 처음 호텔에 도착해서 샤워할 때, 몸이 따끔거리던 기억이 납니다. 맨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호숫물을 끌어다 써서 모래가 많이 섞여있다고 해요. 간혹 약품 냄새가 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리나 양치는 생수로 하며, 되도록 물을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따뜻한 차를 들고 테라스로 나갑니다. 의자에 앉아 멀리서 서서히 동이 트고, 아침 햇살이 퍼져 나가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이렇게 과거도 미래도 다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젖어보는 게 참 오랜만인 것 같아요.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 현재를 의식할 여유조차 없었거든요. 강남역에서 벌어지던 출근 전쟁을 떠올리면 물리적 여유가 없었던 것 같지만, 실은 정서적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고, 과거의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땐 정말이지 매순간이 불행했습니다.


보통 오후 네 시가 넘으면 퇴근을 하고 운동을 갑니다. 단지 내에는 깨끗하고 조용한 운동 센터가 있습니다. 풀밭으로 난 통유리창을 활짝 열고 바람을 맞으며 걷고 뛰다보면 어느새 날이 저뭅니다. 사방이 어둑해지면 나는 아무도 없는 풀밭으로 나와 땀을 식힙니다. 광공해가 없는 이곳의 하늘은 까마득한 먹색이고, 밤바람은 살랑거리고, 잎사귀 흔들리는 소리, 풀벌레 소리, 새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옵니다. 그 순간, 온 우주에 오직 나만 존재하는 기분이 듭니다.


나는 그곳에 가만히 앉아 나의 "있음"을 오롯이 느껴봅니다. 나의 존재를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보는 게 참 오랜만입니다. 이상하지요? 나는 어디에서든 늘 존재해 왔는데 말이죠. 번잡한 도시와 도로의 소음과 시끄러운 사람들과 쏟아지는 상품과 광고와 복잡한 욕망들이 주변을 어지럽히며, "내가, 지금, 여기, 있음"을 인지할 틈을 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타나에 와서 좋은 점은 이게 아닌가 싶어요. 나를 둘러싼 세상을 온전히 느끼고, 그 속에서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살아숨쉬고 있음을 새삼 인식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창밖은 아침이고, 오늘의 오후 두 시는 어떤 모습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업무 파악을 하느라 정신이 없으니, 어렵고 어리둥절한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낯선 도시, 낯선 일터에서 보내는 낯선 오후 두 시가 나쁘지 않네요.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오늘 아침의 마음을 당신에게 보냅니다. 당신의 오후 두 시가 조금은 새롭게 느껴지면 좋겠습니다.


2022년 3월 10일

사과나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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