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마지막 기록
한여름의 12월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더운 연말이라니 어리둥절하다. 사실 어리둥절한 것은 계절만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내가 동아프리카의 섬나라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집과 회사를 반복하는 일상이나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지 않는 생활반경 때문인지, 나는 자주 내가 아프리카에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올해는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터에서 보냈다. 주말에도 연장 근무를 할 때가 많았다. 입사 이래 주말에 제대로 쉬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일터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 자료를 읽고 정리를 했다. 여가랄 것이 별로 없었던 한 해였다.
마다가스카르에 오기 전 윤신언니를 만났던 날이 생각난다. 언니는 걱정하는 내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선택을 했고, 이제 앞을 향해 걸어나가면 되는 거라고. 그 말이 그 무엇보다 힘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언니의 말을 듣자, 상상조차 되지 않는 낯선 세계도, 여전히 안개 속인 나의 미래도, 그곳에서 내가 견뎌야 할 인간들과 시시콜콜한 번뇌도 거짓말처럼 사라졌었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마다가스카르 행 비행기에 올랐다. 나의 2022년은 그렇게 선택을 하고, 묵묵하게 걸어 나갔던 한 해가 되었다.
앞을 향해 걸으며,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좋은 날들이 많았다. 마다가스카르 생활 초반에는 예주와 지선이 있어 행복했다. 예주와 지선의 공통점이라면, 두 사람 모두 시끄럽게 가벼운 말들을 떠벌리고 다니는 류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도처에 가득한, 강자 앞에서 비굴하고 앞뒤가 다른 속물들과도 달랐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한 두 사람은 조심스럽고 이타적인, 말하자면 '좋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좋음에 끌려 예주와 지선에게 다가갔고, 두 사람은 그 좋음을 알아보는 나를 받아주었다. 함께 있는 모든 순간이 즐거웠다. 지선의 냉장고를 거덜내며 맛있는 음식을 해먹거나, 다함께 누워서 영화를 보거나, 오후 내내 음악을 틀어 놓고 춤을 추고, 볕 좋은 날 피크닉을 하거나, 야근을 하다가 사무실에서 함께 맥주를 까거나, 근사한 레스토랑에 한껏 꾸미고 가 기분을 냈던 날도 있었다.
예주와의 퇴근길은 올해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 중 하나다. 예주는 해질 무렵 마다가스카르의 하늘이 이 회사의 가장 큰 복지라고 말했다. 가끔 우리는 퇴근 후에 오래 걸었다. 하늘이 예쁘고, 날이 선선해서. 나는 배려심 많은 예주가 내게 맞춰주기 위해 나와 동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대체로 예주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와 같은 온도로 좋아했다. 그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예주의 머리 위로 하늘이 주홍색, 자주색, 보라색으로 이지러지다가, 반짝이는 별들이 총총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예주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그걸 말해주었다. 예주는 행복해보였다.
예주가 퇴사하고 난 후, 일에 급격하게 매몰되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지방 출장이 있었고, 정기적인 또는 부정기적인 보고서들을 썼고, 사업 관련 기타 잡다한 일처리들을 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마다가스카르의 일몰은 아름다웠고, 아침 공기는 싱그러우며,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은 선한 눈망울과 악의없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지선이 있어 건조한 일상을 견딜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지선의 앞에서 잘 먹고, 잘 웃고, 잘 울고, 욕하며 화도 잘 내고,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른다. 2022년 내내 묵묵히 걸었지만, 항상 혼자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한 밤을 더 자고 나면 새로운 해가 밝는다. 내일이면 햇살이 내리쬐는 한여름의 신년을 맞게 될 것이다. 다가오는 2023년에는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나는 또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고, 그 선택에 따라 다시 앞을 향해 걷게 될 것이다. 지금처럼 앞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것, 그게 나의 2023년도의 계획이라면 계획인 것 같다. 여기에 고요하고 선의로 가득한, 이타적인 사람들을 또 만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돌아보니 올 한 해 씩씩하고 의연하게 참 멀리도 왔다. 1g의 후회도 미련도 아쉬움도 없을 만큼.
해피 뉴이어.
다시, 힘을 내어 발걸음을 옮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