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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May 13. 2023

#59. 빈 칸의 일상을 보내며

2023년 5월의 기록

이곳에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지선과 보낸다. 지선과는 평일에도, 주말에도 함께 일하고, 아침 운동도 같이 하고, 장도 같이 보고, 밥도 같이 먹는다. '일'이나, '장'이나, '운동'이나, '밥'과 같은 필요가 아니더라도, 나는 지선과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함께 웃긴 고양이 영상을 보며 낄낄대거나, 영화를 보거나, 밤산책을 하며, 한 공간에서 각자 핸드폰을 하면서 별 시덥잖은 말들을 던지며 시간을 보낼 때도 있다. 특히 지선이 내가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함께 있는 시간이 혼자 있는 시간을 저만치 앞지르기 시작했다.


지선이 상주하는 내 일상에는 대체로 빈틈이 없다. 우리는 가족이 아니기에 여전히 서로를 신경쓰면서도, 대화랄 수 없는 실없는 말들을 주고 받고, 일터 안팎에서 생기는 사소하고 구체적인 감정을 서로에게 부려 놓는다. 다시 말해, 나의 일상은 지선의 존재와, 지선과 나누는 수많은 유/무의미한 말들과, 세세한 감정들로 빼곡하다. 지선이 있는 일상 속에서 나는 일기를 쓰지 않고, 책을 읽지 않으며, 음악을 듣지 않는다. 요컨대, 온전히 나에게 침잠해야 하는 모든 활동이 중단된다. 그럴 틈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다기 보다, 그걸 하려는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


지선의 성정에서 받는 영향도 있을 것이다. 지선은 혼자만의 시간을 애호하지 않아 보인다. 물론 그에게도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자신에게 취해 있는 시간이 없고, 스스로에게 놀라우리만큼 관심이 없다. 외적으로 꾸미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는 그루밍족에 가깝다), 자기 내면이 어떤지 딱히 파고 들지 않는다. 나 자신이 최애인 나 같은 사람이야 늘 내 욕구와 감정이 어떤지 캐묻고 들여다보지만, 지선은 스스로에게 별로 질문이 없다. 그러다보니 나처럼 혼자 감상에 취해 감정소모를 하거나,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거나 망상하지 않는다. 자기연민 같은 질척이는 구석 또한 보이지 않는다.      


오늘 지선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지선이 한국으로 휴가를 가면서, 간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단짝이었던 지선의 존재가 사라지자, 커다랗게 빈 칸이 생겼다. 처음에는 그 빈 칸으로 바람이 훵하니 드는 것도 같고, 무엇을 해야할까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점점 빈 칸의 헐렁함과 여유가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늘의 나는 일찍 눈을 떠 따수운 차를 마시며 먼 동이 터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를 위한 기도를 했고, 좋은 음악을 듣기 위해 플레이리스트를 검색했고, 오랜만에 음악을 들으며 출근길을 걸었다.


그리고 이렇게 오랜만에 글도 쓴다.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니, 하고 싶고 쓰고 싶은 말들이 생겨난다. 이게 다 일상에서 생긴 빈 칸 덕분이다. 나를 들여다보며, 요즘의 감정 상태는 어땠는지, 내게 무엇이 부족한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참 오랜만에 묻기도 했다. 6월에는 휴가를 떠날 계획이다. 일상의 빈칸이 없었더라면, 휴식이 필요한지도 모른 채, 어제와 같은 오늘을, 오늘 같은 내일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상주하는 일상 속에서도, 아주 작은, 나만의 빈칸은 남겨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허전한 건 허전한 건지, 휴가 계획을 세우고 난 후, 한국에 있는 지선에게 휴가 계획을 알렸다. 지선은 마다가스카르에 가져 올 배드민턴채와 줄넘기를 샀다고 했다. 지선이 다시 상주할 내 일상 속에 달밤의 배드민턴이 추가 될 예정이다. 우리는 또 바보 같은 내기를 하며 경쟁적으로 이단뛰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난다. 다시 지선으로 빼곡해질 일상을 기다리며, 얼마 남지 않은 빈 칸의 시간을 즐겨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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