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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Apr 03. 2019

처음 보는 사람이랑 차 한잔 했어, 네 시간 동안.

그녀와의 이별.




 공공기관에서 계약직으로 4개월 남짓 일을 하고 같은 곳에서 임기제 채용공고가 또 나와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어지간한 회사를 많이도 다녀봤지만 이곳만큼 편하고 복지가 좋은 곳도 잘 없었기에 난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왠지 지원서를 작성하는 내내 너무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차라리 몰랐으면 몰라도 아는 곳이라 더욱 오기 싫은 심보를 아려나. 게다가 내가 지원한 자리는 그 기관의 하고 많은 곳 중에서도 내가 있던 부서의 내 자리 바로 옆이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사람들과 일을 해야 하는 거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자소서를 쓰고도 원서를 미루고 미루었는데 애인의 압박에 다리를 질질 끌며 증명서를 뗐다. 제출해야 하는 서류는 또 왜 이리 많은지, 가뜩이나 마뜩잖은 나는 차라리 빠트린 서류가 있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이런 마음과는 반대로 실제로는 서류를 더블 체킹 했다. 일단 임하면 열심히 하게 되는 이상한 심리가 발동했달까.


 그리고 안타깝게도 서류에 합격을 했다. 본래 서류 합격 후에는 최종이나 마찬가지인 면접시험이 있는데 갑작스럽게 생긴 실기 시험때문에 2차 시험을 치르게 됐다. 백수 생활에 단번에 익숙해져 버린 나에게 시험 당일 오전 8시 30분까지 오라는 말은 잔인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하릴없이 또 무거운 발을 이끌고 몇 개월간 다닌 그곳을 향했다. 익숙하고도 낯선 풍경, 그곳의 아침 공기와 햇살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대기실에는 열 명 남짓 앉아 있었다. 이 중 내 경쟁자는 한 명. 요즘엔 왜 이렇게 주책맞아진 건지. 모르는 사람에게 마구 말을 걸곤 한다. 나 포함 여자는 세 명. 가까이 있는 젊은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000에 지원하셨어요?”

-(눈을 치켜뜸과 흘김을 동시에 하며) “아니요.”

-“아.. 네.”

아무래도 더 앞에 있는 여자일 확률이 높다. 그녀를 흘깃 쳐다봤지만 낯선 사람에게 까이고 또 변죽 좋게 다른 사람한테 말을 걸 만큼의 주책 레벨은 아직 아니었다. 나는 수다를 포기하고 얌전히 진행요원이 나타나 주길 기다렸다.


 우리는 광활한 기관의 각 부처로 가기 위해 큰 차에 실렸다. 나는 내리기 쉬운 자리에 앉았는데 마침내 옆에 말을 못 건 그녀가 앉는 게 아닌가!

-(기회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혹시 000에 지원하셨나요?” (두 명의 웃음)

우리는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질문을 했다. 그리고 느린 속도로 기어가는 차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또 도착해서는 앞사람의 면접을 기다리며 거의 한 시간을 또 수다를 떨었다.-그녀의 주책력도 나 못지않았다.- 결국 우리는 시험을 치르고 차 한잔을 하기로 약속하고 내가 먼저 시험장을 떠났다.


 나는 정문에서 시동을 걸고 그녀가 잘 보이는 위치로 차를 옮겼다. 20~30분 후에 나올 테니까... 11시까지 기다리면 되겠지? 의기양양했던 첫 마음과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정말 진심으로 차를 마시자고 한 걸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냥 던져본 것뿐인데 진짜 기다리고 있는 나를 미저리처럼 쳐다보면 어떡하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갈 때 가더라도 이야기는 하고 가자! 그런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기우였다. 그녀도 나와 같은 레벨이라니까! 우리는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네 시간을 내리 수다를 떨었다. 화장실 갈 새도 없이. 이야기 말미에 우리는 차례대로 화장실을 다녀오고, 휴대폰 번호를 주고받았다.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연락을 하자는 다소 현실성 있는 약속을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굉장히 허심탄회하게 오래된 친구라도 되는 것 마냥 서로의 구석구석을 훑으며 종종 위로해주고 독려도 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자주 웃음을 터뜨렸고 서로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 시간이 꿈만 같았다. 내 친구야, 어디 있었던 거야?

응?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고? 나는 동화 속 소중한 토끼 친구를 잃어버린 심정이 되었다.


 물론 나에게도 슬프거나 기쁠 때 함께하는 소중한 친구들이 있다. 15년 지기 친구들과도 세네 시간 수다를 떨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갑갑함이나 이해할 수 없는 서로의 성향을 못 본 척하지 않고 술술 이야기를 했던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영혼이 통하는 듯한 교감을 느끼며 나누는 대화. 고등학교 야자시간에 라디오 클래식 채널을 이어폰 한쪽씩 나눠 끼고 들었던 그 친구 이후에 처음이었다. 그 친구는 대도시로 신혼집을 차리고 자주 볼 수 없게 되었다.


 간혹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을 결심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척 문화인의 표정으로 끄덕끄덕거리지만 속으로는 정말 신기해했다. 저러다 후회하지 않을까?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내면에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상대방이 나와 맞을지 알게 되는 데에는 시간이 아니라 진심으로 가득 찬 감정 그리고 대화라는 것을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미지의 세계가 아니다. 오로라처럼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내 눈으로 본 적은 없어서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그 경험. 그것의 실재를 만나는 일.


하루 만에 모르는 사람을 신뢰하게 될 수도 있다.

단 네 시간뿐일지라도.

그 시간 동안 나는 내 삶에 본 적 없는 우정을 한 칸 쌓게 되었다.

.

.

.

.

.

.

며칠 후 그녀에게서 카톡 메시지가 왔다.

우리는 2차 시험에서 사이좋게 같이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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