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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May 29. 2019

엄마가 뭉클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유별나게 애틋한 단어, '엄마'.


 엄마가 차려주는 집밥에 대한 그리움, 자취를 하면서 깨닫게 된 엄마의 빈자리.

엄마라는 단어가 이렇게도 애틋해진 데는 전투 가사와 독박 육아라는 어두운이면이 자리 잡고 있다.




 딩크족이라고요? 시댁 어른들도 알고 계세요?


 내 몸에서 열 달 동안 내 장기가 짓눌리는 희생을 감수하며 생명을 키워내고, 말 그대로 생살을 찢어 출산을 하고, 나와 내 남편의 반평생을 바치고, 우리가 번 돈의 대부분을 쓰는 일에 왜 제삼자의 허락이 필요한 걸까.

나와 내 파트너가 아닌 다른 생명을 위해 열 달 동안 내 몸을 희생하고 싶지 않다. 또 태어난 그를 위해 나의 힘과 시간, 다른 삶의 가능성을 뺏기고 싶지 않다. 이 모든 것을 감수해서 낳은 아이가 성인이 되어 한 결정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반기를 들며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신파 같은 대사를 읊는 건 생각만 해도 비참하다. (한 사람의 인생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 건데!)





 몰라서 그런 거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무례한 사람에게 "무례하게 행동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33세다. 그런 말을 하면 아주 정중하게 사과하는 사람도 있고 창피해하며 도망가는 사람도 있고 몰라서 그랬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중에서도 몰라서 그랬다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마치 몰랐으니까 그래도 되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고 몰랐으면 잘못이 아닌 거라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 미취학 아동인 나를 두고 자주 밖에 놀러 갔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어린 자녀를 혼자 집에 두고 밖에 다니는 것에 대해 별다른 감흥이 없다. 미국 드라마에서 아이를 집에 혼자 두고 몇 시간 외출을 다녀온 이유로 경찰서에 가게 된 엄마의 이야기를 보며 적잖이 충격을 먹었다. 아, 저 나라에서는 어린이를 혼자 두는 것을 범죄로 여기는구나. 머리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내가 그 어린 시절에 벽 귀신이 나올까 봐 울었던 것이 단순히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보호가 필요한 나이라서 그런거였구나. 나를 이해하게 되고 안쓰럽게 여기게 되는 동시에 엄마를 미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미움은 점점 나를 집어삼켰다. 하지만 엄마는 몰랐다. 어린 자녀를 집에 혼자 둬서는 안된다는 사실과 내게 상처가 되었다는 것을.


생후 2년이 애착형성에 가장 중요한 시기이며 이때에 제대로 된 케어를 받아야 자존감이 잘 형성되는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말은 이제 진리처럼 여겨진다. '애착형성', '불안 애착'과 같은 단어들을 알게 되고 나의 모든 못난 점은 그런 것들로 인해 기인한 것처럼 엄마와 아빠를 미워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생각은 기정사실화 되어 더 당당하게 그녀에게 받은 상처들을 끄집어내고 헤집게 된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향한 미움과 비난의 화살을 마구 꺼내 엄마를 향해 때로는 나 자신을 향해 쏘고 또 쐈다.





 Look On The Bright Side.


  얼마 전 팟캐스트를 들을 때 게스트가 이런 말을 했다. "엄마가 저를 낳았을 때 지금 제 나이보다 훨씬 어릴 때예요. 애가 애를 낳은 거죠. 아마 아이를 키운다는 것을 잘 몰랐을 거예요.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움도 원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을 듣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사실이다.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의 나이를 가늠해보는 것. 그리고 나에게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


엄마는 언니를 낳았을 때 26살이었다. 내가 26살일 때를 기억한다. 첫 직장에서 언제쯤 갑작스럽게 닥치는 업무도 아무렇지 않게 처리하는 직장인이 될까 고군분투하던 시기다. 직장상사가 웃자고 던진 농담에 몰래 화장실로 가서 울음을 터뜨리던 학생같은 직장인이었다. 그렇다. 엄마는 뭣도 모르는 나이에 첫째 자식을 낳고 2년 후 둘째까지 낳았다. 전투 가사와 독박 육아를 하고 내가 5-6살이 되었을 즈음 나를 집에 두고 외출을 한거다. 긴 시간 끝의 자유였을 것이다. 나는 타인의 엄마 얘기를 듣고 나서야 내 엄마를 처음으로 안타까히 여길 수 있었다.





 엄마가 조금 뭉클해졌습니다.


 나는 가부장적인 한국의 문화에서 탈가부장제를 선언하는 시기, 그 사이에 끼어 성장한 과도기 여성이다. 20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아기는 당연히 낳는 거였지만 33살인 지금은 결혼을 하지 않아도, 아이를 낳지 않아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고정관념마저도 유연히 변화할 수 있는 시기를 살고 있음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31살 일 때와 32살 일 때가 아주 다르다고 느낀다. 32살에 '세상을 사는 방법을 아주 조금 알게 됐구나.'라고 혼자 생각했다. 작년의 내가 왜 이리도 어리게 느껴지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 해 동안 스스로 많이 성장했다고 느꼈다. 사람마다 성장하는 시기가 다르지 않을까. 엄마도 그런 시기가 있었겠지. 그게 어린 우리를 혼자 맡게 된 시기였을 수도 있고 언니가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갔을 때일 수도 있고, 얼마 전 내 결혼식에서였을 수도 있다.


엄마가 다시 태어난다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일을 찾길 바란다. 외할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며 아빠와 결혼하지 않고 유복한 가정에서 돈 걱정 없이 대학교를 갈 수도 있고, 사교성이 좋은 성격을 살린 직업을 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마음껏 하고 싶은 일만 하며 골드미스로 늙어갈 수도 있겠지. 혹은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또 일찍 결혼을 할 수도 있겠지. 어떤 결정이든 사회적인 과제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본인 스스로 결정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좋겠다.








결혼 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자식을 갖지 않기로 했다. 나의 결정을 지지해준 남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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