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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Aug 13. 2019

어쩌다보니 열공

가장 외로웠던 시간을 견디기 위해 공부를 했다.

‘국민의 질병예방과 건강증진을 도모하기 위해 비영리를 목적으로 급식 서비스를 제공하는...’

영양사 면허증을 따기 위해 구입한 두꺼운 문제집의 첫 챕터에 있던 ‘영양사의 정의’는 후에 취업 면접에서 자주 써먹게 된다. 신입직원을 뽑는 자리여서 그랬을까. 의외로 “영양사가 뭐하는 사람이죠?”라고 묻는 면접관이 많았고 그 문구는 내가 답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지였다. 그 때문인지 공부를 한 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맴돈다.










 대학시절 4년 내내 방학이 되면 언니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워낙 둘이 붙어 있기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타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고향에서 엄마의 잔소리를 혼자 들을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언니는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기 위해 부산에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언니가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 수능을 다시 치르는 바람에 나와 같은 학번이라 정말로 4년 내내 방학 때는 함께였다. 언니 자취방의 침대는 일반 싱글보다 좁았지만 우리는 춥거나 덥거나 함께 잤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는 학교에서 뽑아서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교환학생에 합격했다. 그때 나는 대학교 4학년 2학기 겨울방학을 막 앞두고 있었다. 언니가 없이 긴 시간을 혼자 보내는 일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방학이면 으레 부산으로 내려가 유유자적하던 나에게 실연이 닥친 거였다. 하지만 때는 영양사 면허시험을 두 달 앞두고 있는 상황. 식품영양학을 나왔지만 영양사를 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기에 면허를 따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내가 속해있는 대학교에서 좋은 조건의 아르바이트를 제안받았고 여전히 고향으로 가기는 싫었다. 그리고 친한 동생이 자취방이 비니까 쓰고 싶으면 쓰라고 했다. 생활을 할 수 있는 돈도 생기고 방 값 낼 일도 없고 고향 생활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엄마에게 영양사 면허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학교에 남겠다고 했다.


그해 겨울은 아주 추웠다. 유독 기억에 오래 남는 시절의 계절은 혹독하게 느껴진다. 학교에 남아있는 사람은 같은 과 친구 한 명과 동아리 선배들 몇 명이 다였다. 그중에 마음을 터놓을 만큼 친한 사람은 없었다. 아르바이트는 행정실에 앉아있다가 심부름이 생기면 은행을 가는 정도였다.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공부는 할 수 있었지만 잘 될 리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주변의 도움과 행운을 원래 내거였던 것처럼 펑펑 쓰며 생각 없이 방학을 보냈다.


언니와는 하루에 한 번 꼭 화상대화를 했다. 한국시간으로 저녁 9시, 언니에게는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8시. 우리가 정해놓은 시간, 나에게는 하루 중 제일 고대하는 시간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5분이라도 꼭 대화를 했다. 한 달쯤 지났을까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의 행정실장님이 곧 졸업이니 남은 시간을 더 뜻깊게 쓰라며 일하는 시간을 줄여 주셨다. 물론 지루한 시간을 더 이상 견디지 않아도 되어 기뻤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할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언니와의 재밌는 대화시간인 저녁 9시까지 말이다.


나는 빨리 언니와 대화를 하고 싶은데 시간이 안 가니 정말 죽을 노릇이었다. 그래서 할 일도 없고 명색이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니 자취방 옆 학교도서관을 갔다.


때는 2010년, 대한민국에 공무원 붐이 막 일어날 때라 도서관은 항상 사람이 많았다. 나는 공부는 잘 안 해도 공부 자리는 중요한 사람이라 본의 아니게 점점 일찍 나오게 되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공부를 하는데 어쩌다 공부가 잘 되는 날이 있지 않은가. 내가 공부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과목만은 또 열심히 하는 전형적인 중간 성적의 학생이었다. 그런데 공부가 잘 되는 날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간이 엄청 빨리 지나가는 것이다. 그래도 이왕 4년간 식품영양학을 공부했는데 영양사 면허를 따지 못하면 친척들이나 친구들에게 창피할 것 같기도 하거니와 시간도 빨리 보낼 겸 공부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열심히 하다가도 딴짓을 했는데 역시나 시간이 안 간다. '집중하면 시간이 금방 가. 그럼 재밌게 놀 수 있어.' 오로지 이 생각 하나로 열심히 문제집을 정독했다. 매일 공부에 집중하다 보니 그 두꺼운 영양사 시험 문제집을 한 번은 끝까지 읽어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시험날짜는 다가오고 있는데 문제집을 끝까지 풀지는 못했다.


 시험장소는 고향 근처의 대도시. 나는 전 날 미리 가서 하룻밤 묵었다. 08:30분까지 입실인데 내가 시험장소에 도착한 시간은 08:45. 늦으면서 별로 서두르지도 않았다. 국가시험이니 입실시간이 지나면 출입금지 일 줄 알았는데 시험 시작 30분 전에 오라는 건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거였을까, 입실이 가능했다. 긴장한 상태로 1교시를 치렀는데 쉬는 시간에 누가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같은 과 친구였다. 별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정원수가 겨우 31명이었으므로 고등학교 반 친구들처럼 서로 모르는 사이는 잘 없었다. 고향도 대충은 다 아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친구는 친하지도 않은 나에게 "늦게 들어왔지? 놀랬겠다. 후배들이 주는 과자도 못 받았겠네."그러면서 자기 과자를 나눠줬다. 내가 평소에 잘해준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친절한 거지? 나는 친구의 친절에 그만 감복해버렸다. 긴장감과 낯선 장소에서 느껴지는 냉기가 서서히 온기로 바뀌었다. 2교시부터는 편안한 마음으로 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험을 다 치르고 난 뒤 떨어져도 상관없다 생각하며 시험장을 나왔다. 정말이지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가장 대책 없던 시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될 대로 돼라'였다.


시간이 지나 시험 결과가 나왔지만 나는 확인하지 않았다. 당연히 떨어졌을 테니까. 그런데 삼촌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이력서를 넣어보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가슴이 떨렸다. 삼촌은 아빠와 성격이 아주 비슷하고 아빠는 돌아가셨지만 삼촌은 내게 여전히 무섭고 어려운 존재였다. 영양사 시험에 떨어졌단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래도 삼촌 말대로 그곳에 연락이라도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만 같은 마음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통화가 돼야 이력서를 넣을 이메일이나 주소를 받을 수 있는데 전화를 안 받다니 이게 웬 횡재야. 삼촌에게 둘러댈 말이 생겨 기뻤다. 정작 삼촌은 그 일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어느날 갑자기 시험 점수가 궁금해져 한국 보건의료인 국가시험원에 로그인을 했다. 그런데 ‘합격’을 했다. 정말 기가 차고 황당했다. 그렇게 벼락치기로 공부를 했는데 내가 영양사 면허를 땄다고? 말도 안 돼...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해에 영양사 합격률이 높았다. 아무래도 천지신명이 나를 도와준 게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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