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줄 내가 알았겠어요?
면허증을 발급하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삼촌이 주선해준 일자리에 이력서라도 넣을걸'하는 후회.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잘된 일이다.-삼촌에게 조금이라도 빚이 있는 게 싫다.-그로부터 2개월 뒤 모교가 속해있는 지역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때 나는 파 0 바게 0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는데 너무 떨려서 잠깐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왜 나를 부른 걸까?-그전에 많은 곳에 이력서를 냈는데 오라고 하는 곳이 없었다.-내 생의 첫 면접을 앞두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면접관은 총 세 명. 면접은 일대다로 진행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것도 모르는(정장도 입지 않은) 내가 채용되었다. 자차가 없던 당시 '출근을 어떻게 할 거냐, 이곳은 대중교통도 잘 없다'는 말에 나는 "아, 알아보니 마침 9시쯤 도착하는 버스가 있더라고요. 출근할 때는 그걸로 출근하면 될 거 같습니다!(해맑)" 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차가 있었지만 내가 합격했다.
첫 직장은 지역에서 이름깨나 알리고 있는 재단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 개원한지는 2년이 되었지만 인원이 많지 않았고, 입소문이 나면서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어 *영양사를 채용했다. 다행히 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의 경력 많은 영양사에게 업무를 한 달 동안 배웠다. 그리고 나는 시설로 출근을 시작했다. 시설에 조리원은 두 명. 말이 조리원이지 우리 할머니보다도 연세가 많으신 거 같다. 처음에는 일하다가 쓰러지시는 거 아닌가 걱정이 많았지만 두 분은 정말이지 열심이셨고 맡은 바 임무를 아주 잘하고 계셨다. 아무것도 모르면 오히려 일이 없다. 그렇게 일 없는 생활이 조금 지나고 일일 업무와 단체급식의 법적 서류도 터득을 하게 되니 수정해야 할 것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법적으로 식수인원이 50명 이상이 되면 영양사를 채용해야 한다.
사무실 직원은 나 포함 세 명. 내 나이 또래는 0명. 처음 인수인계를 받은 곳을 '본원'이라고 불렀는데 본원 영양사가 부러웠다. 그곳은 젊은 직원이 많고 우선 직원 자체가 300여 명이었으니까. 하지만 심심하고 지루한 날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을 익힐수록 나의 요청사항은 많아졌다. 조리원 할머 여사님들은 오랫동안 해오신 일이니 요청사항을 다 흡수하는 게 쉽지 않으셨고, 직장 동료라 할 수 있는 보호사들은 엄마 또래지만 나를 '딸'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딸 같은 나이'라는 말은 굉장히 많이 들었다. 그 문장의 꽃말은 '딸처럼 부려먹겠다'이다. 그 덕에 이직해서도 '딸 같다'라고 하는 직원을 제일 먼저 경계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된다.
후에 동갑내기 직원이 들어오고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동료가 생겨 기뻤지만 상사의 악의적인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그는 40대 초반 여성으로 우리 시설의 장이었다. 입소자 대부분은 그녀가 데려왔고 수익을 늘려줬으므로 재단 이사장님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하여 누구도 그에게 반기를 들 수 없었고 코흘리개 신입이었던 나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괴로운 날도 지속되지만은 않았다. 나를 괴롭히던 상사는 정말 말 그대로 쫓겨났다. 그날은 주말 당직근무로 인해 쉬는 날이었는데 동갑내기 직원이 메시지로 현장 중계를 해주었다. 그가 다른 곳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는데 우리 시설의 입소자를 대거 빼돌리는 조건으로 연봉 협상을 했다는 것이다. 이사장님이 몸소 찾아와 쫓아냈다고 했다. 다음날부터 출근길이 가벼워졌지만 내 눈으로 직접 쫓겨나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이것은 첫 직장에서의 고난 편 중 서막에 불과했다. 그 후의 사건들은 사무실 직원이 확충되면서 각종 업무 떠넘기기와 이간질이 난무하는 흔한 사내 정치 이야기다. 미국에서 돌아와 고향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언니는 내 회사 이야기를 듣고 제발 그만두라고 했다. 나는 이때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다. 문제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혹은 알면서도 모른척하며 스스로를 오랫동안 방치했다.
영양사 일을 시작하게 된 그곳은 규모가 있어서 다양한 일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잃은 것도 많았지만 얻은 것도 많다.
영양사에 대한 대내외의 평가는 모두 '좋은 신붓감'으로 점철된다. 온갖 회계 일과 문서관리, 인력관리, 법적 서류 관리를 하는지는 잘 모른다. 영양사가 되기 위해 제일 처음 배우는 전공필수 과목은 유기화학이다. 후에 식품학-나도 이 순진한 이름에 속았었다. 하지만 귀여운 이름과 달리 다시 화학이 등장한다-과 생리학 등 인간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꽤 깊고 넓게 배운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고작 3대 영양소 혹은 뭘 먹어야 살을 뺄 수 있느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 취급당한다. 직업적 전문성에 대해서는 너무 평가절하 당하고 있다.
영양사는 정말 하기 싫었다. 4학년 때 나간 영양사 실습의 영향이었는지, 단순히 머리망과 가운을 입고 있어서 꾸미지 못하는 직업 특성 때문인 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가 와서 전 직장에서 받은 연봉의 두 배를 준다고 해도 다시 할 생각은 없다. 전 직장은 내 영양사 생활 중 가장 많은 연봉을 받은 곳이다.-그만큼 영양사만큼은 다시 하고 싶지 않다.-그런데 왜 이 글을 쓰고 있냐고? 내가 하고 싶지 않을 뿐 그 직업을 존경한다. 그리고 예전부터 영양사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회를 계속 노리고 있었다.
아직 한 이야기는 별로 없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