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아일랜드를 다녀왔다. 짧고 굵었던 그 여정을 풀어볼까 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5월과 6월이 지나고 뻥 비어버린 스케줄표 안에서 나는 도파민 중독의 길을 택했다.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소재들. 요즘 유행하는 콘텐츠는 모두 섭렵하는 게 목표였고 그 목표는 생각보다 빠른 시간 안에 달성되었다. 그러다 동생의 추천으로 본 넷플릭스의 ‘체인지 데이즈’라는 연애 프로그램을 매주 챙겨 보게 되었는데 똑똑한 넷플릭스의 알고리즘은 ‘러브 아일랜드’라는 또 다른 연애 프로그램을 추천해주었다. 내가 한참을 빠져 본 것은 러브 아일랜드 아메리카 3편이었다.
러브 아일랜드는 한 섬 혹은 러브 아일랜드라 칭하는 어떤 장소에 사랑을 찾아온 남녀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유사 제품 주의. 유사 프로그램이 많아 친구들이 그게 어떤 프로그램이야? 하고 물으면 ‘솔로 지옥 같은 거’라고 간결하게 설명해준다. 러브 아일랜드는 그런 프로그램이다. 서로의 짝을 찾고, 짝이 없거나, 때때로 환상의 커플이 되더라도 미국 대중의 사랑을 (투표를) 받지 못하면 탈락된다. ( 역시 민주주의 ) 평균적으로 2회에 한번 탈락자가 발생했던 것 같은데, 참여인원이 계속 줄어드는 시스템이 아니라, 무한증식의 시스템이다.
어디 가서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라 당당하게 말하기엔 다소 민망한 이 프로그램은 생각보다 많은 시사점이 있다. 적어도 내겐 여러 생각할 거릴 던져주었다.
첫번째로 그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의 스팩트럼이 우리가 말하는 아름다움의 스팩트럼보다 넓고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참가자 중 가발을 벗어던진 흑인 여성이 나온다. 그게 진심이었던, 아니었던 그녀의 용기에 모두 저마다의 칭찬과, 응원을 보낸다. ‘네가 얼마나 큰 일을 했는지’ 라던가 ‘네 본연의 아름다움이 좋다’ 던가. 흑인 여성에게 가발을 던져 버리고 나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님을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 된 나는 그녀의 용기에 감탄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여성 혹 은 남성을 두고 아름답다고 칭찬할 때 우리가 자주 말하는 납작한 아름다움보다는 훨씬 다채롭다는 것을. 나도 모르게 참가자의 콧볼이나 광대 따위에 신경 쓸 때 그들은 용기, 유쾌함과 재치를 보기도 한다는 것을 보며 묘하게 부끄러워졌다.
두번째는 그들의 에너지다. 매일 남녀가 모여 덤벨을 들고 근력 운동을 하는 것은 이 프로그램 시그니처 오프닝이다. 그 모든 게 너무 자연스러웠고 에너지 넘쳐 보였다. 화면 밖까지 땀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남녀가 상대편이 되어하는 게임도 신기했다. 동등한 위치에서 힘과 운동신경을 요하는 게임을 하는 모습이 내겐 생소한 그림이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에너지 때문일까 한국에선 잔잔하고 때론 비장한 음악과 함께 제작진에게서 메시지가 오는 반면, 여기선 ‘아이 갓어 테에에엑슽!’라고 외친 후 ‘텍! 텍! 텍!’하고 우렁차게 외친다. 그들 중 엠비티아이가 i로 시작되는 사람이 있긴 할까? 미국 전체 사회는 몰라도 러브 아일랜드에선 내향인은 배척당할 것이다.
마지막은 그들의 솔직한 감정 표현이다. 극 외향인이 틀림없을 그들의 솔직함은 내가 고구마를 먹을 틈을 주지 않는다. 발신인 불명의 쪽지나 눈빛, 기묘한 텔레파시가 아니라 끊임없이 마음에 드는 이성을 불러내어 솔직하게 말한다. 네가 좋다. 너의 재치가 좋았고 너의 밝은 에너지가 좋았다. 글로는 쓰고 싶지 않은 양손가락이 오그라드는 멘트도 주저 없이 던진다. 그러면서 너도 좋고 쟤도 좋다는 말을 당당히 한다. 애써 돌려 말하지 않는다. 둘 다 좋아해서 문제가 생길지언정 저 사람이 내게 호감인지 아닌지 치열한 눈치 싸움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여러 이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여성 참가자를 두고 욕하지 않는다. ‘우린 여기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러 왔으니까’라는 멘트는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솔직한 감정의 표현은 이성 간에서 뿐만이 아니다. 한 여성 출연자는 한 남성과만 커플 매칭이 계속되었는데 지고지순하게 자신의 짝만 본 그녀와 달리 그녀의 짝은 새로 온 뉴 핫 걸에게 뜨거운 키스를 하고 침대를 나누어 쓴다. 그 일을 알게 된 다른 여성 참가자는 크게 분노하며 내 친구에게 그따위로 굴지 말라고 소리친다. ( 이들은 정말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당사자는 그렇게 화내지 않았다. 참고로 결국 남성 출연자는 눈물을 흘렸다.) 때론 조금 극적이지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것이 나는 더 편했다.
물론 러브 아일랜드의 모든 것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곳에 다시 갈 자신이 도저히 없다. 여성 참가자들과 남성 참가자들에게 ‘치장’ 타임이 주어졌을 때 남성 참가자들은 가벼운 티셔츠에 반바지, 머리 손질 도합 10분 안에 끝나는 데에 반해 여성 참가자들은 베이스부터 컨투어링까지 완벽한 화장, 속눈썹, 머리 세팅, 그리고 몸의 실루엣이 다 보이는 딱 붙는 옷을입고 내 손 뼘 높이 정도의 하이힐로 숨 쉴 틈 없는 스타일을 마무리한다. 옷을 입지 말라는 규칙은 없는데 ( 실제로 내레이션에도 나왔다 ) 남자는 웃통을 모두 벗고, 여자들은 손바닥 만한 비키니만 입고 생활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진심으로 그들의 왁싱 상태나, 뱃살을 걱정해야 할 호흡 따위가 걱정되었다.
참가자들의 이름이나 성격을 외울 때쯤 새롭게 추가된 뉴 핫걸 핫 보이를 헷갈리기 시작할 무렵, 진행자의 ‘토~놔아아잇’의 외침이 지겨우질 무렵 이 프로그램의 치명적인 단점들이 내게 시사하는 바보다 커질 무렵 나는 시청을 중단했다. 그렇게 아주 짧고 굵게 러브 아일랜드를 다녀왔고 모든 여행이 그렇듯 즐겁고도 고단했으며 그러나 남는 것은 분명 있었던 그런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