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빵 이야기
오늘 먹은 빵은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둘째 별이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정확히 말하면 학교 수업을 6교시까지 듣고, 치료센터에 들러 특수체육 수업까지 듣고 집에 온 것이다. 오늘은 첫째 봄이가 학원에 가는 날이라 외할머니가 별이 마중을 나갔다. 학교 셔틀버스에서 내린 별이는 할머니 차를 타고 센터에 다녀왔다. 집에 오니 어느새 5시가 넘었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인 별이는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아침에 헤어진 엄마랑 이제야 만나니 울컥했는지 나를 보자마자 별이는 울먹였다. 발달장애로 인해 특수학교에 다니고 있는 별이는 여느 아이들보다 더 바쁜 스케줄 속에 살고 있다. 언어치료, 인지치료, 특수체육 수업까지. 거의 매일 학교 끝난 후 재활 수업을 듣는다. 대부분 나와 함께 다니지만, 오늘처럼 제 누나가 일이 있는 때에는 할머니의 손을 빌린다. 분리불안이 꽤 심한 별이는 나와 떨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수업에 갈 때 어쩔 수 없이 엄마와 헤어지지만 다시 만나면 심통을 부리고는 한다. 엄마와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은가 보다.
집에 오니 별이는 배가 고팠나 보다. 차에서 간식을 주어도 잘 먹지 않았다더니 식탁 위에 있는 빵을 냉큼 집어 들었다. 별이가 가장 좋아하는 '초코 소라빵'이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초코 소라빵은 집에 겨우 한 개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별이가 가지고 있는 여러 어려움 중에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감정의 '전환'이 안 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신나게 놀다가 수업 종이 올리면 놀이를 멈추고 교실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아이들이 있다. 하던 것을 멈추는 것, 좋아하는 일이 단절되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 별이의 경우에는 좋아하는 노래나 동영상이 끝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노래가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우왕 울음을 터뜨려버리거나 화를 내는 것은 다 감정의 '전환'이 잘 안되기 때문이라고 별이를 진료한 선생님들은 종종 이야기하고는 했다.
초코 소라빵도 마찬가지다. 배가 고픈 순간, 맛있는 빵을 아마도 계속 먹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남은 빵은 단 한 개. 별이는 이 빵을 다 먹기도 전에 아마도 울음을 터뜨려버릴 것이다. 좋아하는 빵의 부재,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종결되는 것을 별이는 지극히 두려워하고 싫어하니까. 급한 마음에 배달의 민족 어플을 켜고 빵집에 빵을 주문했다. 초코 소라빵은 넉넉히 4개를 주문하고, 최소 주문금액을 채우기 위해 식빵과 머핀, 내가 먹고 싶었던 달달한 찹쌀도너츠까지 주문했다. 별이에게는 계속 설명해주었다. 아저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초코 소라빵을 가지고 오고 있다고. 이 빵이 끝이 아니라고 말이다.
다행히 별이는 오늘 빵에 집착하지 않았다. 빵을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새로운 빵이 도착했다. 그야말로 총알배송이었다. 적절한 타이밍에 배달된 빵을 별이에게 먹이려고 봉투를 열었다. 하루 종일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던 나도 어서 당을 보충하고 싶었다. 초코 소라빵을 꺼내며 내 몫의 찹쌀 도너츠를 찾는데, 아무리 봐도 빵이 담겨온 쇼핑백 속에는 찹쌀 도너츠가 없었다.
예전에도 주문한 물건이 제대로 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 1리터 우유를 주문했더니 이 빵집에서 200밀리리터의 작은 우유를 보냈던 것이다. 아르바이트생의 실수인지, 사장님의 실수인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아마 실수를 했나 보다 생각했다. 이미 꺼내놓은 빵을 찬찬히 세어보니 초코 소라빵도 개수가 이상했다. 우리 집에 총 5개의 초코 소라빵이 있어야 했다. 원래 있던 1개와 새로 가져온 4개까지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초코 소라빵은 4개밖에 없었다. 어떻게 빵을 2개나 안 보낼 수 있지. 게다가 내가 기다리던 찹쌀 도너츠를 빠트리다니 정말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달의 민족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예전에도 해본 적이 있어 익숙하게 번호를 눌렀다.
배달 오류는 생각보다 간단히 처리되었다. 사상 초유의 배달의 시대인 만큼, 잘못 배달되는 음식들도 많은가 보다. 상담원은 우리가 시켰던 빵집으로 연락해 빵 2개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달했고, 곧 빵집에서 전화가 왔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분이었다. 사장님이나 셰프님인 것일까. 아무튼 오지 않은 찹쌀 도너츠와 초코 소라빵 값 2,800원을 계좌로 환불받기로 했다. 죄송하다는 인사도 들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마음 한쪽으로 무언가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에 왠지 모를 수긍하지 못하는 억울함 비슷한 감정이 아주 미세하게 느껴졌었다. 뭐지, 이 찜찜함은.
잠시 후 싱크대에서 초코크림이 묻은 접시를 발견하고 나는 멘탈이 붕괴되는 것 같았다. 옆에 있던 친정엄마에게 물었다. 혹시 별이가 초코 소라빵 한 개를 빵이 오기 전에 먹어치운 거냐고. 사건의 전말은 그러했다. 빵집에 빵을 주문하고 내가 잠시 큰 아이 봄이의 옷을 갈아입히러 안방에 들어간 동안에, 별이는 할머니에게 집에 남아있던 초코 소라빵을 달라고 해서 순식간에 먹어치웠던 것이었다. 친정엄마는 무심코 소라빵을 먹었던 초코 크림이 묻은 접시를 치웠고, 나는 별이가 그새 소라빵을 먹은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빵이 배달된 후 찹쌀 도너츠의 부재로 한껏 짜증이 난 상태에서 초코 소라빵의 개수조차 한 개 모자란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내가 계속 빵이 모자란다고 했을 때 친정엄마는 그저 주문한 빵보다 덜 왔겠거니 생각했다고 했다. 누구 다른 사람의 핑계를 대보고 싶었지만, 어디다 탓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별이가 혹시 빵을 이미 먹었는지, 내가 친정엄마에게 한 번만 물어봤다면 되었을 일이었다. 먹고 싶었던 찹쌀 도너츠가 오지 않은 것과 지난번 그 빵집에서 실수를 했던 일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결국 소라빵에 대한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주저 없이 고객센터의 번호를 눌렀고, 환불까지 받은 상태. 빵집 아저씨의 말투가 왜 마음에 걸렸는지 깨달음이 오는 순간이었다.
차라리 끝까지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빵이 좀 덜 왔어도 바빠서 그런가 보다 좀 무던히 넘겼더라면 어땠을까. 유난히 피곤한 날이었기에 단 것이 당겼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껏 가시를 바짝 세웠던 것일까. 1,300원짜리 초코 소라빵 하나로 인해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끝까지 모른 척할 것인가. 빵집으로 전화를 걸 것인가. 무안함과 쪽팔림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묵과해도 별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스물다섯 살 이후로 내 좌우명은 한결같았다. '정도를 걷자'. 평소 좌우명 같은 것을 그다지 생각하고 살지는 않았는데, 20대 후반에 들어서자 취업을 위해 수많은 자소서(자기소개서)를 써야만 했다. 자소서에 빠지지 않는 단골 항목이 좌우명이었다. 그때 내 좌우명으로 삼기로 한 것이 지금까지 마음속에 남아 있다. 정도, 즉 바른 길을 걷자는 의미는 스스로를 속이거나 편법을 쓰지 말자는 뜻이다.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잔머리를 쓰지 말자는 의미도 포함된다. 이쪽, 저쪽 어느 쪽으로 갈지 고민되는 때에는 먼 훗날 뒤돌아보아도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않을 길로 가는 것. 후회가 조금이라도 덜 남을 선택지를 선택하는 것. 당장은 조금 손해를 보는 것 같더라도 그런 기준을 세우고 살아가니 마음은 조금씩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망가는 것은 능사가 아니니, 조금 가시밭길이라도 앞에 놓인 갈 길을 가자는 다짐 같은 것이다.
초코 소라빵 하나로 정도를 논하자니 너무 거창한 감이 없지 않지만, 침대에 걸터앉아 1분 정도 잠시 고민하니 답은 쉽게 나왔다. 민망함과 무안함은 당연히 수반되는 것이겠지만, 고객센터에 다시 전화를 하기로 했다. 먼 훗날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초코 소라빵 값 1,300원을 토해내야 했다. 아울러 나의 부주의함도 같이 말이다. 다만, 아까 그 빵집 아저씨랑 다시 통화를 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어서, 친절한 고객센터 직원에게 빵집의 계좌번호를 물어 내게 알려달라고 했다. 다행히 배달의 민족 상담원들은 고객응대 교육을 투철하게 받았는지 불편한 기색 없이 내 뜻을 들어주었다. 잠깐이지만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다.
빵집 아저씨의 전언은 이러했다. 환불해 준 빵값 중 초코 소라빵 값은 서비스 차원에서 다시 돌려받지 않겠다고. 아마도 사장님이신 듯했다. 순간 우문현답을 들은 듯, 누군가에게 머리를 한대 탁 맞은 기분이 들었다. 아저씨의 실수도 물론 있었고(내 찹쌀 도너츠), 내 부주의도 있었다. 초코 소라빵 값 1,300원은 여전히 내 계좌에 남아있는데 왠지 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돈을 돌려주어야 나는 속이 시원할 것 같았는데, 이제는 방법이 없어져 버렸다. 아저씨의 서비스가 고맙기도 하고, 끝내 못 돌려준 게 찜찜하기도 했다. 별 수 없이 배달의 민족 앱으로 들어가서 별 다섯 개의 후기를 썼다. 자세한 내용은 빼고, 오해도 있었는데 잘 해결해주신 친절한 사장님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아무튼 빚을 진 마음에 나는 다음에도 이 빵집에서 빵을 주문해먹게 될 것이다. 어쩌면 빵집 아저씨는 1,300원 가치 이상의 것을 고객인 나에게서 두고두고 가져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등바등하지 않고 조금 멀리 보는 것, 조금 크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는 하루였다. 나도 요즘 작은 사업(이라기보다는 점빵 수준이지만)을 시작하려고 해서 그런지, 더욱더 빵집 아저씨의 마음씀이 크게 다가왔다. '정도를 걷자' 와는 또 다른 차원의 좌우명을 하나 더 생각해봐야겠다. '작은 것에 연연하지 말자.', '크고 넓게 보자.' 쯤 되려나. 작은 것을 놓아버리는 것으로 인해 무엇을 얻었는지 훗날 쓸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 초코 소라빵을 볼 때마다 두고두고 오늘 일이 떠오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