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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Jul 11. 2021

엄마가 웃어주지 않았잖아요.

엄마의 불안은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별이네 학교에 확진자가 나왔다는 문자를 받은 건 십여 일 전의 일이었다.


 전교생 전수검사가 운동장에서 이루어졌다. 유치부부터 고3을 넘어 전공반 아이들까지 덩치는 제각각이라도 마음은 다들 아직 어린아이인지라 검사는 수월하지 않았다. 스피커에서 연신 울려대는 불안한 교내방송에, 이미 한참을 넘긴 하교시간.  전신에 파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몰려와 아이  하나당 서넛씩 매달려 입에 코에 면봉을 쑤셔 넣었으니, 지적장애 전문 특수학교의 운동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달려온 엄마들의 차로 나머지 운동장은 가득 찼다. 정작 검사받는 아이들에게  모습이라도 들키면 아이들은 더욱 동요할걸 알기에, 엄들은 그저 스쿨버스 뒤에 숨어 내 아이의 검사가 진행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자기 차례가 되자 별이도  악을 쓰며 발버둥 쳤고, 어른 네 명의 손을 빌어 겨우 검사를 마쳤다. 다행히 다음날 검사 결과는 음성이라는 문자가 왔다. 학교에는 더 이상의 확진자가 없어 3일간 가정보육 후 등교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 올라간 불안으로 별이는 집안에서  시시때때로 소리를 질러댔고, 방바닥을 쿵쿵 뛰어다녔다. 몇 달 전 시끄럽다고 3층에서 내려온 기억에, 나는 기겁을 하며 별이를 말렸다. 그럴수록 별이의 불안은 높아져갔다. 날카로운 표정과 목소리의 엄마를 보며 별이의 눈물이 잦아졌다.


 가정보육이 끝나고 겨우 별이가 등교한 다음날 나는 크게 앓았다. 앓아도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치료센터에 데려다주고, 다시 집에 데려와 밥을 먹였다. 아이 아빠가 늦은 밤 퇴근하고 나서야 비로소 침대에 누워 설거지도 미룬 채 죽은 듯이 잠을 잤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다.


 별이의 불안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누워 있는 엄마를 보며 배가 아프냐고 연신 물었다. 아픈 엄마는 별이에게 또 다른 불안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이의 표정은 이미 오래전부터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오늘, 오랜만에 커피를 사 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루에 서너 잔 마시던 커피를 며칠 만에 처음 마셨다. 겨우 내 몸의 컨디션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라는 신호였다. 문득 깨닫고 보니 오늘은  별이에게 한 번도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별이도 평소 무서워하는 소아과에 다녀와도 울지 않고, 집에서도 보채지 않았다.  괴성도 사라졌다. 불안할 때마다 치고 올라오는 중얼거림도, 뛰어다니는 행동도 사그라들었다.

 내가 별이에게 웃어주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깨달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코로나에 걸리기라도 할까 봐. 학교에 안 가는 동안 행여 이웃에게 피해라도 줄까 봐. 엘리베이터에서 불쑥 괴성을 지를까 봐. 쿵쿵대는 소리에 또 누군가 현관의 초인종을 누를까 봐. 불안해 먼저 웃음을 잃었던 것은 바로 나였다. 그런 엄마의 불안이 별이에게 전해졌고. 찡그린 내 얼굴을 종일 마주했던 별이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사라졌던 것이었다.


 불안이 높은 아이라는 타이틀에 갇혀서 매사 아이의 불안을 탓했었다. 예민한 아이임을, 그래서 돌발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음을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게 점점 버거워졌었다. 아이의 몸이 커지고 목소리가 커지니 더했다. 자꾸 피하고 감추는 삶으로 도피하다 보니 아이는 잘못이 없는데 잘못한 게 되어버렸다. 커버린 별이에게 더 이상 세상은 관대하지 않다고 지레 단정 짓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이웃들의 눈을 피해 계단을 찾아갈 궁리만 했다. 사실은 따뜻한 말을 건네는 분들도 있었는데 말이다.


 장애를 사회에 납득시키는 삶이란 고단한 삶일 것이다. 그저 우리는 이렇다. 내 아이는 이렇다. 있는 그대로 내놓고 살아갈 배짱이 아직 부족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불편을 주어 정말 미안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친구들도 있다는 것을. 이건 누구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그냥 ', 이 아이는 렇구나. '하고 아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길거리에는 여전히 발달장애인도 지체장애인도 흔히 보이지 않는다. 엄마의 차 안에, 장애인 콜택시 안, 특수학교의 스쿨버스 안 앉아 세상을 피해 다니고 있다. 예전에 일본에 사는 어느 작가님의 에세이에서, 그곳은 길에장애가 있는 주민을 만나는 게 흔한 일이라며, 그렇게 그냥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다며. 한국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길 바란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엄마의 고질적인 불안은 그날이 되어야 끝날지도 모른다. 가끔 길에서 중얼대거나 갑자기 괴성을 지르는 아이를 보더라도 너무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해치지는 않는다. 조금 당황스럽겠지만 언짢아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사실 그 아이와 가족들이 더 많이 힘들다. 세상에는 일정한 비율로 이런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있다는 걸 그냥 알아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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