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imeejong Jul 16. 2024

보육원 아이와 친구가 되지 못했다

다큐멘터리 '다시 찾은 우리'를 보고

다큐멘터리 '다시 찾은 우리'는 미국 가정에 입양된 릴리, 클로이, 세드나 세 소녀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은 DNA 검사를 통해 생물학적으로 친척 관계이다. 비록 멀리 떨어져 다른 삶을 살고 있음에도, 그들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유대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하 함께 중국으로 건너간다. 중국에서 그들은 자신이 버려진 거리와 어린 시절 길러진 보육원을 방문하며, 보육원에서 자신을 키웠던 보모를 만난다. 비록 친부모를 만나지는 못하지만, 같은 처지로 자식을 보내야만 했던 다른 부모를 만나 대화를 하기도 한다.


1979년부터 2015년까지 중국 정부는 1가구 1자녀 정책을 시행했다. 1자녀 이상을 둔 가정에는 벌금이 부과되는 등 각종 사회적 불이익이 있었는데, 이를 견디지 못하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버려야만 했다. 특히나 전통적인 남아선호 사상으로 인해 가정에서는 여자아이들을 많이 포기하였다. 그렇게 버려진 많은 아이들이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특히 중국의 입양 정책이 변화하면서 2000년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는데, 넷플릭스에 등장하는 3명의 인물 역시 2000년 중반에 태어나 미국에 입양된 10대 후반의 소녀들이다. 


이 소녀들은 그들을 사랑해 주고 그들에게 헌신하는 미국인 부모를 만나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들은 아시아인이 극소수인 지역에서 성장하면서 깊은 외로움을 느낀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집에 돌아가서도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그들이 혼자라는 생각을 더 강하게 했을 것이다. 또한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려졌고 입양되었다는 과거가 깊은 상처가 되어 여전히 그들을 괴롭힌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극복하고자 해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그녀들을 더 힘들게 하며, 어떤 친구는 '부모가 너를 원하지 않지 않았기 때문에 버려졌다'는 말을 하기도 오히려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중국 방문은 그들에게 어려운 도전이다. 자신의 정체성과 역사를 확인하고 싶으면서도, 그것을 실제로 마주치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운 마음이 크다.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입장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짧게 생각을 해봤다. 부모가 어땠었고,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은 어떤 마음이어야 그나마 마음이 덜 아플까. 내 생각에 부모는 중국 정부의 정책 때문에 자신을 정말 어쩔 수 없이 힘들게 버렸어야 한다. 남자아이가 아니라서, 버려진 아이가 자신뿐만 아니라 여러 명이면 더 슬플 것 같다. 그리고 그 부모가 자신처럼 여전히 가슴 깊이 마음 아파하고 여전히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상황이어야 할 것이다. '그땐 그런 일이 많았어'하면서 상대적으로 덜 힘들어한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다. 또 그들이 남은 자식 하나와 굉장히 행복하고 부유하게 살고 있거나, 그렇다고 또 너무 부모와 그 가정이 힘들고 비참한 삶을 살고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또 슬플 것 같다. 어려운 문제다. 


이 다큐멘터리는 입양아 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도 전달해 준다. 첫 번째 인물은 입양한 부모들이다. 그들은 양육에 최선을 다했으면서도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자신들이 혹시 실수를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두 번째 인물은 그녀들의 부모를 찾아주는 일을 하고 있는 류하오다. 그녀도 어린 시절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해 버려질 뻔했으며, 성장과정에서도 아버지에게 차별을 받았다. 자신은 환영받지 않는 아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그녀에게 있어 입양아들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세 번째 인물은 버려진 아이들을 임시로 키웠던 보육원의 보모들이다. 열약한 상황에서도 사명감을 갖고 버려진 아이들을 키워 냈으며, 그들의 중국에서의 짧았던 역사를 증명해 주고 기억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국민학생 때 같은 반 아이들 중에 보육원에서 사는 친구가 있었다. 그 애랑 친하지는 않았지만 나와 접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같은 도시락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급식이 시행되기 전이라 학생들은 집에서 도시락을 싸서 갔어야 했는데, 보육원을 다니던 그 친구는 점심을 싸 올 형편이 안되었다. 학부모 회의를 거쳤는지, 담임 선생님이 우리 엄마에게 요청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친구의 도시락을 우리 집에서 담당했었다. 엄마는 똑같은 도시락을 두 개를 만들었고,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도시락을 두 개를 들고 학교를 갔다. 점심시간이 시작되면 그 친구에게 하나를 전달했는데, 같이 밥을 먹지는 않았고 각자 친한 친구들과 밥을 먹었다. 


도시락을 싸주면서 엄마는 보육원 다니는 애가 힘들고 불쌍하니 차별하지 말고 잘 대해주라고 했었다. 내가 그렇게 했는가 뒤돌아 보면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매일 해진 옷을 입고 꾀죄죄한 얼굴에 머리도 안 감고 오던 그 친구가 싫었다. 그런데 걔만 그랬냐 하면 그때는 그런 애들이 꽤 있었다. 요즘과는 달리 스스로 일어나서 씻고 옷을 입고 학교를 가던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부모님과 같이 살아도 종종 그런 경우가 있었다. 결국 나는 보육원에서 사는 부모 없는 아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던 것이다. 그저 도시락을 전달하는 게 다였는데도 친절하지 못했고, 그것이 너무 미안하다. 그 친구는 꽤 운동을 잘했다. 왼발잡이었던 그 아이는 학교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축구 실력이 좋았다. 나도 축구를 좋아했기 때문에 친구가 되었을 법도 한데 결국 친구가 되지는 못했다. 

작가의 이전글 그럼에도 공동체를 노래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