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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메이징 그레이스 Feb 01. 2023

나의 여신님, 20대 후반의 선택지

[나의 사람들] 수희 언니

언니는 한국에 두고 온 사랑이 있었다. S대학교 대학원생이라고 했었다. 3년 정도 만났고 이 긴 여행이 끝나고 돌아가면 그 사람과 결혼할 것 같다고 했다.

'결혼할 것 같다'라는 말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표현된 말이 아닌, 정해진 수순에 따를 거라는 약간의 자조적인 느낌으로 들렸었다. 그렇다고 한들 그들의 사이나, 상황, 분위기 등등이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20대 후반의 어느 한 직장인이 삶의 쉼표를 위해 이곳에 왔고, 푹 쉬다 돌아가도 늘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 그 사랑은 틀림없는 '믿음'인 것이다. 그때의 나와 또 어쩔 수 없이 비교를 해보자면, 한국에 있는 내 남자친구는 국제전화임에도 불구하고 평균 2~4시간마다 전화해서 나의 위치와 상황을 살피고 확인했다. 이해가 되다가도 때로는 그런 것들이 진절머리가 났었다. 차라리 헤어지고 올걸, 하는 후회도 했지만 그곳에서 이별을 고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로를 믿고 각자의 시간을 허락해 준 커플이 내 입장에서는 성숙한 어른 같아 보였다.


언니가 시드니에 온 지도 5개월을 지나 반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시드니는 한창 겨울이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거나 칼바람이 불거나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없었지만, 11월의 비 내리는 한국의 날씨가 계속되는듯한 그런 추위였다. 스산했지만 그 정도 추위는 따뜻한 커피 한잔이면 금세 포근하다 느낄 수 있는 겨울이었다. 호주의 겨울은 인간의 외로움과 비슷했다. 외롭고 무언가 서글퍼 미치겠다가도 누군가의 따뜻한 온기만 느끼면 금방 회복되는, 그곳의 겨울은 감정으로 기억되어 있다.


호주와 계절이 반대인 한국은 여름휴가철이 시작되는 듯했다. 언니의 남자친구도 휴가를 내고 1주일간 시드니로 휴가를 올 거라고 했다. 언니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남자친구 오랜만에 만나서 좋지 않냐니까 "당연히 좋지"라고 했다.


"근데 그레이스야. 좀 복잡해."

"언니, 뭔지 알 거 같아. 나도 아마 남자친구가 내가 보고 싶어 미치겠어서 당장 시드니를 온다고 하면 좋긴 할 것 같은데 딱 하루만 좋을 것 같아."


그곳에서 바람을 피우고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남자친구가 시드니에 온다면 너무 싫을 것 같았다. 내 생활을 침범당하는 느낌이랄까. 언니의 생각은 나랑 분명히 다른 것이겠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내생 각과는 분명히 다른 무엇이 있을 터였다.


그때 주영언니와 나도 이미 각자 다른 집으로 이사해 함께 살고 있지 않을 때였다. 각자 새로운 셰어하우스를 구해 이사를 갔고 그로 인해 주영이 언니와 수희 언니를 만나는 일도 줄어들었다. 주영이 언니는 캐나다 남자친구가 생겼다. 남자친구의 이름은 에릭이었는데, 에릭은 요리를 하는 것을 좋아하고 아주 잘했다. 에릭이 해주는 음식은 다 맛있었다. 에릭 덕분에 다양한 음식을 먹어 볼 수 있어 더 좋았다. 어느 날, 에릭이 맛있는 요리를 해 주겠다고 우리를 불러 모았다. 약 한 달 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 에릭이 자신의 프랑스친구 한 명도 데리고 와서 새롭게 알게 되었다. 랭귀지 스쿨을 다니면서도 다양한 국가의 친구들을 만나기가 힘들었는데, 랭귀지 스쿨도 다니지 않는 언니들은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는지 새삼 신기했다. 나는 그저 그런 것들에 신기해하는, 눈치가 정말 심하게 없는 사람이다. 그날은 수희언니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기 위해 주영언니와 에릭이 만든 자리였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오랜만에 언니들을 만나서 그저 반갑고 좋기만 했던 나는 그동안 있었을 일들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다.

"언니, 남자친구 잘 만나고 헤어졌어? 헤어질 때 안 슬펐어?"

그리고 데이트로 어디 어디 다녀왔냐, 남자친구는 시드니가 처음이었냐 이런 질문을 했다. 질문을 하면서 싸한 느낌이 들었다.


"슬펐어. 엄청 울었지."


수희 언니의 대답에 주영이 언니가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수희언니는 말을 이었다.


"남자친구도 시드니 처음 온 거였지. 근데 데이트 안 했어 거의. 난 퇴근하고 와서 피곤하다고 잠만 잤고, 아마 낮에 혼자 돌아다녔을 거야. 그리고 마지막날 오빠가 혼자 달링하버 다녀오고 그다음 날 한국으로 돌아갔어."


주영이 언니는 더 이상 수희 언니가 말을 못 하게 막는 듯 가로채며 말했다.


"쟤 헤어졌대."

"아..."


삼 년 이상을 만난 남자친구와 시드니에서 반년만에 재회를 했는데 그 만남이 곧 이별이 된 것이었다.


"남자친구가 돌아가고 거의 일주일 동안 방에서 울기만 했어."


울었다는 말을 언니는 울지 않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에 울어버렸다. 그제야 알아차렸다. 언니가 평소보다 눈이 좀 부어있었다. 다시 보니 그새 언니 눈이 빨개져 있었다.


나중에, 주영이 언니가 수희 언니 얘기를 더 해줬다.


"뻔한 거 아니겠니... 삼 년을 만났는데, 그 오빠는 나이가 더 있으니까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면 결혼할 거고.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쟤는 지금 막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잖아. 그냥 그걸 선택한 거지."


나야 그 나이에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얼마나 큰 결심을 한 건지 쉽게 공감이 되지는 않았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두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봤다. 그러는 사이 주영이 언니는 말을 이어갔다.


"오빠도 되게 황당할 거야. 내가 한 달 먼저 여기 왔고 수희는 나 만나서 쉬다 오겠다고 하고 왔고 쿨하게 보내준 것뿐인데. 그 일로 헤어지게 됐어. 여기 와서 첫날 프러포즈 했대."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남자가 너무 가여웠다. 마지막 밤, 달링하버를 혼자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달링하버의 그 반짝이는 화려한 야경이 얼마나 슬펐을까. 달링하버라는, 누구든 그 경치를 보면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서 "오 마이 달링!"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고 해서 만들어진 명칭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너무도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혼자 한국으로 돌아가는 10시간, 비행기 안에서 처음 여자친구의 여행을 허락했던 자신을 얼마나 원망했을까. 사랑했던 남자를 그렇게 보내고 난 후 언니는 얼마나 미안해하며 혼자 울었을까. "그렇게 좋은 사람 또 만나지 못할 거라는 거 알아"라고 말했었다. 재잘재잘 이야기 하는 거 좋아하던 언니가 엄청나게 많은 말들을 줄였다.


그 후 언니를 만날 때마다 언니의 얼굴과 표정을 살폈다. 내가 언니의 얼굴을 볼 때마다 바랬던 것은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나는 언니의 삶이 궁금했다. 시드니의 고연봉자들이 모여서 일한다는 동네에 출근하는 언니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며 가졌던 호기심 이상으로 궁금해졌다. 나도 그런데 언니 자신은 자신의 앞날이 얼마나 더 궁금하고 기대되었을까. 20대 후반이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했던 때가 아닌가. 사랑 말고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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