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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경김웅기 Mar 27. 2020

사랑이 잠에서 깨어났다

최승자 시인을 만나다

사랑의 피로는 비극이 됩니다.
비극은 최선의 행복이죠.
정말 그런 삶을 살고 계신가요?
할 말이 많은 사람들
그러나 묵비권이야말로
시의 유일한 권리입니다.

<밤부엉이>를 읽고



     최승자. 이름만 들어도 거룩한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다만 <즐거운 일기>라 해서 펼쳤다가 이보다 더 '슬픈 일기'는 없을 거란 생각과 함께 다시 덮었을 때, 아마 가을 같은 봄이었지 하는 기분만 내게 선명하다. 대학시절 교류했던 문우들에게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 하고 물으면 남자들은 김수영 또는 기형도를 지목했고, 여자들은 최승자를 지목했다. 이런 앙케트 결과는 최승자의 언어가 비극에 가깝고 죽음에 가깝지만, 그래서 어떤 언어보다도 강력한 생명력을 지니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사회는 현재 병이 들었다. 실제로 전염병이 창궐해 있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정신적으로도 우리를 해치려고 드는 무수한 사건들 탓에 더욱 힘들다. 너무 많은 사건을 인터넷으로 접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신문이나 뉴스를 잘 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종이신문은 고사하고 인터넷 뉴스도 잘 보지 않는다고 한다. 정치를 공부하는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요즘은 가짜뉴스도 정말 많고, 정치 관련한 기사가 너무 많아서 읽을 게 없다고 한다. 친구는 오히려 뉴스보다는 유튜버들이 전하는 소식통이 더욱 공신력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그날 밤 유튜브를 켜 '정치' 하고 검색을 해 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사람들이 a to z 식으로 정치 관련 이슈 관련한 모든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방송을 하고 있었다. 다른 키워드들도 마찬가지였다. 또 하나의 방송국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유튜브나 sns에 익숙한 우리, x세대가 아닌 'z 세대'에 속한 내가 이런 콘텐츠 자체에 큰 경이로움을 느낀다면 그건 거짓말이거나 바보천치거나 둘 다일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많을 수가 있는가, 그리고 이렇게 전문적일 수가 있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만큼 '진실'이 귀해졌다는 뜻일 터.

     1980년대, 불과 40년 전만 해도 우리의 언론은 강력하게 통제됐다. 일명 '보도지침'에 따라 언론은 쓸 수 있는 것만 쓰는 정부의 하수인 노릇을 오래도록 했다. 그것이 부당한 처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자들이 군부독재 정권에 어떻게 맞설 수 있었겠나. 언론사회에 잘못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언론만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시절에 시인들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만 가지고 있어도 잡혀 들어갔고, 마르크스를 읽다가 잡혀 들어갔고, 밤에 모이기만 해도 잡혀갔다. 북한으로 망명한 시인의 시집은 연구는 고사하고 읽을 수도 없었다. 국가가 비정상이니 소수사회는 세상 저편의 이야기였다. 어떤 시인은 절필을 했고, 어떤 시인은 절에 들어갔다. 그뿐이었다.

     1980년대 현대시의 특징이라고 하면 단연 서정성이다. 대부분의 시들은 점점 더 비열해져 가는 국가와 너무 커져버린 나, 그 사이에서 고통을 부르짖는 분노의 노래였다. 최승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는 조금 다르다. 그의 시를 관통하는 가장 몸집이 큰 단어는 바로 '사랑'이다. 누군가로부터 불리고, 또 용기 내어 부르고, 돌아봤다가, 돌아서버리는 그런 사랑 말이다. 사랑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사랑은 '고독, 애증, 후회, 미련' 등으로 불린다. 대부분 멀리 와버린 것들이다.

     너무 멀리 와버려서 때로는 언제 누구를 미워했는지도 모르고 밤마다 사랑을 오독하는 일이 멋있어 보였.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내 청춘의 영원한>


     그야말로 골방 같은 곳이었다. 현관문을 열면 바로 침대가 보였다. 작은 화장실과 베란다가 딸린 원룸. 분명 풀옵션이었는데, 이 옵션이 나를 더 망가뜨리는 것 같은 느낌. 그렇게 대학시절의 마지막 해를 골방에서 보내고 있었다. 가끔은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편이 속 편할 때가 있어서 그날 밤에도 문을 걸어잠그고 방 불을 끈 뒤, 작은 조명 하나만 켰다. 그리고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을 펼쳤다. 분명 춘삼월이었지만 "개 같은 가을"(14p.)처럼 바람이 밤새 창을 두드렸던 그날 기억이 선명하다. 그 이후로 나에게 사랑의 의미는 한층 다양해졌다. 아름다운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지나간 사람도 사랑이고 앞으로 만날 사람도 사랑이라는 듯, 사랑은 그렇게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밥을 먹기 시작했고 키가 조금 컸으며, 혼자 있으면 말을 떼기도 했다.

     때로는 너무 많은 시인이 살아남아 있다는 것에 겁을 먹는다. 그들의 사랑방식은 가끔 무섭기 때문이다. 지구를 없애기도 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 핀셋으로 모르는 얼굴을 모두 집어내 우주에 갖다 버리기도 하니까. 하지만 최승자의 사랑 방식은 오래도록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줬다. 술자리에서 김수영이나 기형도가 아니라, 그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면 대뜸 나에게 페미니즘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들의 무례와 상관없이 나는 아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남자라서 미안하다고 했다. 최승자는 대단한 여류시인이기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영 엉뚱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이유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여류시인, 이 말에 숨겨져 있는 모든 정치성을 차치하고 싶다. 나는 단지 최승자의 사랑방식을 사랑한다. 결코 포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폭압의 시절에서부터 시인은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랑의 비명을, 어느 진짜 가을날이 되어서는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해를 했을 때 비로소 가을이 올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나는 요즘 누군가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욕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렇게 옅어진 '곁'들에 대한 생각을 하면 슬퍼지긴 하지만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이 힘들면 그의 시를 읽다. 그러면 '이 시대의 사랑'이 조금 더 인간다워지고, 모든 게 괜찮아졌다.


최승자(1952~)

시집으로 많은 시집이 있는데 내가 갖고 있는 건 <이 시대의 사랑>과 <즐거운 일기>다.
불을 끄고 읽으면 글자에서 은장 빛이 난다.
차갑고 아름다운 빗물 소리 들린다.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

**표지사진은 2009년 <GQ>4월호 인터뷰 사진을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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