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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경김웅기 Apr 16. 2020

무기력을 유기했다

임화 시인을 만나다



대뜸 말하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시는 '굉장히 슬프다'와 '굉장한 슬픔' 사이에 존재한다. 또는 전자가 후자를 바라볼 때 생긴다. 더 정확히는 후자를 발견하기 전까지 전자는 '없는 존재'다. 다시 말해, 기분의 물성이 느껴질 때 시는 가능하다(전혀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오늘 기분이 좋지 않다. 이 감정엔 분명 '기분 좋지 않음'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자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내가 희미해지는 순간이 꼭 필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욕망 따위는 없는 거울처럼, 시는 너무 환하게 서 있다.

사실 시에 관해서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많은 시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 책장에 꽂힌 대략 백여 권의(시인 지망생 치고는 현저히 적은 수의) <문학과지성시인선>에 이름을 올린 시인들이 쓴 '시인의 말' 또는 '후기'를 나는 작은 시론처럼 읽었으므로, <문학동네시인선>이니 <창비시선>이니 갖가지 시집의 '시인의 말' 또는 '후기'까지 카운트한다면, 어느 정도 시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시의 정의는 무한대라고 나는 말한다. 이 외에도 물론 거의 무기처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양장에 싸인 오래된 시론들이 또 따로 가득하다. 옛 시인들의 전집 속에 숨어 있는 시론과 시작노트까지 합친다면 이 방에서도 충분히 시론에 한 토론이 어느 정도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나는 시론에 빠삭한 사람 대열에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착각이다. 학교의 어느 선배 집에는 오천여 권의 시집이 있고 전집이며, 영인본이며, 시론-양장이며 자신이 쓴 시론까지 있으며, 심지어 그 스스로가 시인이니 말이다. 그야말로 내가 비벼볼 클라스가 못 된다는 점에서 시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 열심히 해야겠다!' 하는 깜찍한 긍정이 오늘은 왠지 발동이 되질 않는다. 오로지 무기력하다. 이런 날이면 거의 병적으로 시집을 겉핥기식으로 읽고 던져다. 내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해줄 수 있는 '시인의 말'이나 '시'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그 옹호로부터 영원히 보호받을 수 있을 거란 안도감 속으로 무기력을 다시금 봉인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오늘은 책을 읽다가 이런 무기력이 찾아와 버렸다. 이런 날엔 답이 없다. 그것은 적어도 내 게으름에서 오는 무기력이 아니라 내 능력 밖의 사람으로부터 깨닫게 된 무기력인 탓이다. 나는 너무 좋은 글이나 책을 읽으면 무기력해진다. 그러한 글이나 책을 쓴 작가를 한없이 존경하면서도 두 번 다시 보기 싫어진다. 사실 이럴 때마다 수영의 "나는 딱히 존경하는 시인은 없다"는 말이 퍽 위로가 되기는 하지만, 오늘은 이보다 조금 더 강력한 위로가 필요한 날이 분명다.

인생을 꽤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한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것이 좋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문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곤 한다. 물론 문학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아니다. 이때 호구지책의 목적은 마음의 공허를 해소할 수 있는 예술적 욕망을 채우기 위함에 있다. 그것은 아무런 책이나 읽어서는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근작을 읽는 것은 이 병세를 더욱 악화시키는 꼴이자,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나는 아주 먼 과거로 간다. 사실 그래 봤자 백 년이 채 안 되는 시기로 타임머신을 돌리는 것이지만, 나에게는 그러한 역사적 생경함이 꽤 많은 도움이 되다. 욕망이 비칠거리는 세계, 세계 자체가 적이 되는 공간 속에서, 절규가 너무도 익숙한 시대를 스치듯 부서져 간 시인들을 공감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시가 필요한 시대가 있었다.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문학의 존재 자체가 낭망적이었던 세계가 있었다. 그런 시대와 세계가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 문학은 충분히 의미있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 있음'은 나를 무기력의 구렁텅이에서 극적으로 구출해주거나, 과감히 내 마음속에 쌓여온 무기력을 밖으로 버려줄 것이다. 사실 무엇이 무엇을 잡아먹고 있는지 잘 모르겠으므로, 정확히 그 시점부터 우울이 꽤 구체적인 모양으로 발견되는 탓에 나의 sos는 더욱 절실해진다.

오늘은 '임화'가 좋겠다. 지금으로부터 딱 일 년 전, 나는 수업 시간에 임화에 대한 소고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경주 촌놈'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유치하긴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 별명을 흔쾌히 받아들인 마음 한편에는 '언젠가 경주 촌놈이 (좋은 의도로) 일 한 번 낸다'라는 욕망이 함께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별명은 나를 움직이게 했고, 비로소 그 발표 이후 정확하게 '일제시대 지식인'으로 바뀌게 됐다. 진심? 진심이다.. 국문학도식 유우머라고 해두기에는 여기에도 작은 서사가 있기에 말해주고 싶다. 사실 그냥 지식인도 아니고 일제시대 지식인이 된 까닭에는 임화가 일제강점기 보성고보 중퇴 주제에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서기장까지 역임했다는 사실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는 일본의 프롤레타리아동맹가들과도 친하게 지냈고, 그야말로 그 시절 최고의 풍운아였다. 그래서 일제시대 지식인이란 별명엔 그만큼 임화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과 함께, 임화를 공부하면서 나 또한 조금씩 자신감을 찾고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 그러한 내면의식이 내재된 문장을 귀신처럼 알아챈 선생님의 놀라운 학습지도능력에 경탄하는 순간이 공존한다. 꽤 근사하게 포장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나는 분명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임화는 일제강점기 시대 전대미문 천재이면서도, 가장 문제적인 시인이다. 그가 주도했던 혁명적(또는 진정한) 리아리즘(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 본다. 다들 알고 있듯 리얼리즘이다)을 위해 남긴 시와 평론, 문학사는 오늘날 우리나라가 일본의 근대문학 향하여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을 열어주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임화가 시도했던 예술적 욕망의 다채로운 분출은 읽기만 해도 전율할 수 있어서, 누구든 환상을 갖게 만들기 충분다(나는 오늘 소설가 정지돈 씨의 <영화와 시>를 읽었고-정확히는 이 책 때문에 굉장히 무기력하다..-그는 예술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단계를 총 삼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환상을 갖는 것이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네거리'가 많이 나온다. 정확히는 '종로네거리'인데, 나는 사실 종로네거리가 어딘지도, 또 아예 그런 것이 있는지도 잘 모른다. 아마도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버스에서 내리면 길 한복판에 서게 되는데(서울의 버스정류장 시스템은 가히 충격적이었으며 경주 촌놈에게는 너무 무서운 구조이기도 했다) 그때 사방으로 나 있는 길이 종로네거리인가 싶다. 아무튼 그 네거리를 통과하는 시인의 식민지의 슬픔과 근대에 관한 욕망, 그리고 일종의 향수는 마치, 랭보의 <나쁜 피>를 읽으며 한 번도 보지 못한 악마의 선언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해 줬다. 그리고 동시에 "혁명은 못하고 방만 바꾼다"는 수영의 공간으로부터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했다. 실제로 수영은 임화를 만난 적이 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전이었을 텐데, 최하림(이제 곧 있으면 그의 10주기다)에 따르면 수영이 임화를 티 나게 졸졸 따라다닌 것은 아니지만, 그 매력을 은근 흠모하고 있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다(<김수영 평전>). 그렇다면 적어도 나에게는 이보다 완벽하며 매력적인 시인은 없다는 최상급이 가능하다. 다름 아닌 수영이 좋아한 시인이니까! 사실 나는 이상보다도 임화를 더 좋아한다. 이상보다 더 잘 생겼고(조선의 발렌티노라는 별명이 있다) 이상만큼 다재다능했으며(영화감독이자 배우이자 영화사를 썼고, 시인이자 시론과 문학사를 썼고,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대장이었다) 이상의 아방가르드보다는 임화의 리얼리즘이 체질상 나에게 더 맞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화의 시를 잠자코 읽고 있노라면 쉽게 말해서 가슴이 금방 뜨거워진다.

독일말로 '예술의욕'이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독일 유학을 했던 똑똑하고 귀한 분이 어느 날 내가 sns에 올린 임화 관련 게시물에 단 댓글에 그리 적혀 있었다. 다행히 예술의욕으로 번역을 해주어 아직까지 남아 있게 된 반쪽짜리 단어가 임화에꼭 맞는 옷 같다는 생각을 한다. 종종 임화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기관차에 비유되곤 했다. 의욕이 과했다는 말이 그에게 닿을 때는 왠지 칭찬 같다. 그래서 너무 일찍 죽었다고 탄식해도 결코 탄식만은 아니게 되는 묘험한 기운이 그에게는 있다. 죽을 때도 그냥 죽지 않고 무려 미제 스파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문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문제적인 임화를 만난 이후 나는 무기력을 회복하는 데 그를 종종 이용하곤 한다. 바로 오늘 같은 날에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에게 내 무기력을 유기하는 것이다. 찾을 수 없게, 찾을 이유도 없게 그의 거리에 내던지고 오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사고회로를 한 번 거치고 나면 도저히 내 인생에 있어서 허무주의란 틈입할 수가 없게 된다. 단지 그의 작품과 예술세계가 대단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굉장히 슬프다'의 가장 정확한 언어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굉장한 슬픔'이 실존하던 시대에 필요했던 문학을 직시하는 느낌으로 나는 다시금 내 예술을 추동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래야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가장 큰 슬픔은 무엇인가? 나의 적은 누구인가? 나는 왜 시를 쓰는가?' 이런 질문들은 내 생활에서 꽤 궁극적인 것들이다. 나를 살게 한다. 그리고 비록 이 질문들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또 제자리로 돌아온다 할지라도, 임화는 굳건히 나를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으로부터 나는 생의 활력을 보장받고 있기 때문이다. 읽어보면 알 것이다. 그의 시는 언제나처럼 결말에 가장 가까운 언어다.

지금도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맞고 보내며,
전차도 자동차도
이루 어디를 가고 어디서 오는지,
심히 분주하다.

네거리 복판엔 문명의 신식 기계가
붉고 푸른 예전 깃발 대신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린다.
스톱-주의-고-
사람, 차, 동물이 똑 기예 배우듯 한다.
거리엔 이것밖에 변함이 없는가?

낯선 건물들이 보신각을 저 위에서 굽어본다.
옛날의 점잖은 간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다지도 몹시 바람은 거리를 씻어갔는가?
붉고 푸른 '네온'이 지렁이처럼,
지붕 위 벽돌 담에 기고 있구나.

오오, 그리운 내 고향의 거리여! 여기는 종로 네거리,
나는 왔다, 멀리 낙산 밑 오막살이를 나와 오직
네가 네가 보고 싶은 마음에...
넓은 길이여, 단정한 집들이여!
높은 하늘 그 밑을 오고가는 허구한 내 행인들이여!
다 잘 있었는가?
오, 나는 이 가슴 그득 찬 반가움을 어찌 다 내토를 할까?
나는 손을 들어 볓 번을 인사했고 모든 것에게 웃어 보였다.
번화로운 거리여! 내 고향의 종로여!
웬일인가? 너는 죽었는가, 모르는 사람에게 팔렸는가?
그렇지 않으면 다 잊었는가?
나를! 일찍이 뛰는 가슴으로 너를 노래하던 사내를,
그리고 네 가슴이 메어지도록 이 길을 흘러간 청년들의 거센 물결을,
그때 내 불쌍한 순이는 이곳에 엎더져 울었었다.
그리운 거리여 그 뒤로는! 누구 하나 네 위에서
청년을 빼앗긴 원한에 울지도 않고,
낯익은 행인은 하나도 지나지 않던가?

오늘밤에도 예전같이 네 섬돌 위엔 인생의 비극이 잠자겠지!
내일 그들은 네 바닥 위에 티끌을 주우며...
그리고 갈 곳도 일할 곳도 모르는 무거운 발들이
고개를 숙이고 타박타박 네 위를 걷겠지.
그러나 너는 이제 모두를 잊고,
단지 피로와 슬픔과 검은 절망만을 그들에게 안겨 보내지는 설마 않으리라.

비록 잠잠하고 희미하나마 내일에의 커다란 노래를
그들은 가만히 듣고 멀리 문밖으로 돌아가겠지.

간판이 쭉 매어 달렸던 낯익은 저 이계
지금은 신문사의 흰 기가 죽지를 늘인 너른 마당에,
장꾼같이 웅성대며, 확 불처럼 흩어지던 네 옛 친구들도
아마 대부분은 멀리 가버렸을지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순이의 어린 딸이 죽어간 것처럼 쓰러져 갔을지도 모를 것이다.
허나, 일찍이 우리가 안 몇 사람의 위대한 청년들과 같이,
진실로 용감한 영웅의 단(열한) 발자국이 네 위에 끊인 적이 있었는가?
나는 이들 모든 새 세대의 얼굴을 하나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건재하라! 그대들의 쓰린 앞길에 광영이 있으라"고.
원컨대 거리여! 그들 모두에게 전하여다오!
잘 있거라! 고향의 거리여!
그리고 그들 청년들에게 은혜로우라,
지금 돌아가 내 다시 일어나지를 못한 채 죽어가도
불쌍한 도시! 종로 네거리여! 사랑하는 내 순이야!
나는 뉘우침도 부탁도 아무것도 유언장 위에 적지 않으리라.

<다시 네거리에서> 전문

임화(임인식, 1908-1953)
<다시 네거리에서>는 내가 경험한 종로네거리에서 한 모퉁이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겟한 <해협의 로맨티시즘>에서 인용했다.
정지돈, <영화와 시>(시간의 흐름, 2020)은 좋은 책이고 임화와는 관련 없다.
내가 쓴 임화에 관한 소고의 제목은 <임화 시에 나타난 헤테로토피아 공간 연구 - 네거리 시편을 중심으로>이며 지금 펼쳐 보니 칭찬은커녕 상당한 졸작이다. 선생님과 학형들의 찐 사랑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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