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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경김웅기 Apr 24. 2020

시의 언어 속으로

오규원 시인을 만나다



<현대시작법>은 한국에서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꼭 거쳐간다는 책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지난주에 샀다. 학부 4년에 대학원 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시인이 되고자 했으면서도 <현대시작법>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아무래도 시를 씀에 있어서 방법이랄지, 이론이랄지 하는 것들이 너무 딱딱하게 느껴진 탓이 컸다. 그러고 보니 그 긴 시간 동안 창작 수업 역시 들었지만, 그때마다 강의서로 샀던 <시론집>들을 단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 시라는 장르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화자는 무엇이며 주체는 무엇인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정배열해놓은 글이었으므로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 내가 이제 와서 오규원의 <현대시작법>을 읽어보기로 마음먹은 까닭엔 '제대로 시를 써보자'하는 심중이 은근 작용한 탓도 있겠지만, 사실은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는 그의 시집을 읽으면서 '이런 시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우선했던 것이 더욱 컸다.

사실 시를 창작하면서 자신의 시론을 결정화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론과 실제는 항상 다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완벽한 시법이 있어도 그것을 작품에 적용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수업을 듣다 보면 이론과 실제의 괴리 탓에 시인을 재조명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김기림이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바다와 나비>라는 작품은 다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한 번씩 접해 봤으리라. 흰 나비에 밑줄 긋고 새파란 초생달에 밑줄 그으며, 그것들을 민족과 파도(시련)의 상징어로 해석한 적 있을 것이다. 지금 보아도 이 작품은 감각적으로 상당히 훌륭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 외에 <기상도>나 <태양의 풍속> 등의 작품도 있는데 이 작품들은 하나 같이 난해하다. 김기림은 철저한 모더니즘을 꿈꿨던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과학시'라는 주장을 펼치게 되는데, 그 이론의 기본 골자는 다음과 같다. 모더니티(근대성)를 담보하기 위해서는 기교주의를 지양하고 철저한 과학적 사실주의에 기반한 형식을 체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므로 읽히는 대로 사전적 해석을 해도 무리가 없음을 밝힌다). 그러면서도 내용은 사상을 지닌 생명력 있는 시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사상과 형식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시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이론적 결함이 없으며, 더구나 30년대에 그러한 생각을 했다는 것은 많은 연구자로 하여금 흥미를 이끈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그러한 이론이 잘 적용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다는 주장이 많다. 어떤 작품들은 형식적으로 현실과 유리된 과학적 묘사로 범벅이 되어 있어 난해하기만 한 것이다.

김기림 전공자가 아니라서 위와 같은 해석에 반박의 여지가 넘칠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잘못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을 주시라! 다만 김기림 전공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김기림의 매력은 시가 아니라 시론에서 더욱 드러난다고 말한다. 사실 둘 중 어느 한 가지만 잘하더라도 대단한 것이라 생각한다. 지난주에 우리가 만났던 임화는 어떤가? 그 또한 김기림과 동일 시대 인물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그의 초기 시적 노선은 김기림보다는 단순한 차원이었다. 물론 뒤로 갈수록 수정 및 보완이 되어 문제적인 인물이 되지만, 처음에는 기교주의 논쟁에서 시적 형식을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치부한 것이 임화의 시론이었다(이 또한 사전적 해석으로도 무리 없는 구간이다). 임화는 조선의 발렌티노이자 시도 곧잘 쓰는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서기장이었지만, 김기림보다는 시론에서 완벽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만일 두 사람이 둘 다 잘했다면 아마도 문학사의 판도는 아주 달랐을 것이다.

이제 다시 오규원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시론이 아니라 <현대시작법>을 펼쳤다. 시론과 시작법이라 했을 때 둘 사이에는 약간의 뉘앙스 차이가 있다고 본다. 시론은 단순히 해석하면 시의 이론이지만, 그것은 실상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대전제로 한 시인의 사상서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시작법>은 우선 그러한 느낌은 들지 않는 워딩이다. '이 책을 읽으면 현대시를 어떻게 써야 할지 알 것 같다' 정도의 느낌을 준다. 물론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서론에서도 그가 밝혔듯 시를 처음 쓰는 초보자들을 위한 친절한 매뉴얼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방법론을 예시를 들어가며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시에 관한 시인의 사상보다는 '시란 이런 것이다'라는 확언을 대전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시론과는 다르다고 본다. 또한 그의 작품 연보에서도 밝히고 있듯 <현대시작법>은 시론이 아니라 창작 이론이다. 그렇다면 앞서 이야기했던 '이론과 실제'에 관한 예시가 곧바로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와 <현대시작법>의 구도라는 대위법적 차원으로 적용되기에는 다소간의 비약이 존재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의 시론이 모두 녹아 있다. 다시 말해서 이론을 실제에 적용하기 쉽게 번역해 놓은 책이 바로 <현대시작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놓고 보니 내가 이 책을 홍보하는 문학과지성사 마케팅과 사원이 된 것만 같다(그러면 얼마나 좋으랴?).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현대시작법>을 읽고 그의 시를 읽으면 예전에 읽은 시라도 새롭게 다가온다는 진귀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는 1987년에 출간된 시집으로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최초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낸 대한민국의 표정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가장 처음에 실린 작품을 여기에 옮겨 본다.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집 개의 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 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다. 자 봐라, 꽃피고 싶은 놈 꽃 피고, 잎 달고 싶은 놈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옳다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봄> 전문


이 시를 처음에 읽었을 때는 그냥 감동만 했었다. 1987년, 대한민국에 있어 거대한 타자로만 존재하던 자유가 드디어 주체화되는 순간을 봄으로 표상하고 있는 듯한 상징적 묘사들이 가슴에 켜켜이 쌓여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이 시를 <현대시작법>을 읽고 다시 읽는다고 생각을 해보자. 배운 대로 우선 창작법의 첫 스텝만 기술해 본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바로 관점이었다. 어떤 관점을 가질 것인가? 누군가는 실제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누군가는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떤 노선을 취해도 좋고 혼용해도 좋다. 다만 각 관점 속의 방식에는 우열이 있다. 실제적으로 표현함에 있어서 가장 좋은 관점은 감각적 지각과 사실적 지각이다. 감각적이라는 말은 시적 대상의 행동을 그야말로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머릿속에 시적 대상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환하게 재현될 수 있도록 말이다. 사실적이라는 말은 시 내부로 들어온 어떤 정황이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은 사실을 그대로 베껴 쓴 것이 아니라 시를 읽었을 때 사실로 느껴진다는 점에서 사실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관점에서는 풍자적 지각과 해석적 지각이 좋은 관점이라 할 수 있다. 풍자는 시적 대상 이면에 숨겨진 모순을 드러낼 수 있는 조소의 언술을 펼치는 것이다. 해석이란 시적 대상을 둘러싼 여러 가지 정황과 사건을 시인이 자신의 사상과 철학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 쭈욱 서술되어 있고, 나는 초보자이기 때문에 초보자 매뉴얼에 따라 그것을 소설처럼 쭉쭉 읽어 갔다. 그리고 다시 이 시를 보았다.

"언어의 담벽"이나 "언어의 뜰" 이런 것들은 추상적인 관념이다. 하지만 해석적이고 "개똥"이나 "꽃"이나 "반짝이는 것" 이런 것들은 구체적이지만 사실적이다. 봄을 지옥으로 해석함에 있어서 그마저도 자유라는 사상이 담겨서 역설적 미학의 감각이 일어난다! 이 시를 어떤 층위에서 감각하고 해석하고 있는지를 봤을 때 나는 드디어 시의 내부로 들어와 '느낀다'는 감정을 얻었다. 시 읽기가 한층 더 재밌어진 기분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데는 사실 구닥다리 느낌 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나는 시를 쓰고자 하는 문학청년이자 시인 지망생이지만 합평을 죽어라 싫어했다. 내가 내 시를 평가받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그만큼 내가 다른 이들의 시를 평가해줄 수 없다는 게 많이 속상했다. 사람들은 나의 시를 읽으며, "이 시는 정황은 좋은데 뭔가 감각적이진 않은 것 같다"라거나 "호흡이 너무 벅차고 묘사가 덜 드러나 있다"라거나 "이건 형식은 시인데 내용은 시가 아니다"라는 식의 조언을 해줬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을뿐더러 그들의 시만 읽으면 "잘 모르겠다. 조금 더 생각해 보겠다"라거나 "이거 너무 좋은데?"라는 식의 말밖에 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번은 합평에서 "나는 시를 잘 볼 줄도 모르고 여러분들에게 내 시를 보여주면서 이토록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라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선배들이고 후배들은 나에게 "괜찮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정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꾸준히 시를 읽었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급기야는 내가 좋아하는 시집을 읽어도 "이 시에 대해 말하는 게 두렵다"는 느낌이 막연히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집이 나로부터 잠깐 멀어지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겨버렸다. 시에 대해서 말하라. 나는 시라는 것을 '노력+운명적으로 얻게 된 투시안'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읽고 있으면, 한 사람이 오는 게 아니라 그이 너머로 예술이 오고, 철학이 오고, 세상이 오고, 우주가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에 대해서 말하라'라는 질문을 받으면 '한 사람만 보이고, 그이 너머로 모든 것이 깜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정말 선물처럼 오랜만에 소름 끼치게 읽은 시가 바로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에 실린 <봄>이었다. 그래서 오규원이라면 나의 트라우마를 해결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현대시작법>을 그 자리에서 바로 주문한 것이었다. 물론 <현대시작법>만 읽는다고 해서 마법처럼 갑자기 어떤 시에 대해서 말을 잘해질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시의 언어 속으로 조금씩 들어가고 싶었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든 것 같다. 노력하여, 500쪽에 달하는 이 책을 독파하면 코로나가 끝나고 합평을 한 번 하자 해야겠다. 나는 멋지게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오규원(1941-2007)
<분명한 사건>
<순례>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 거의 다 읽어보시길 추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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