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절망이 끝나면 또 다른 절망으로 접어들게 된다는 우리의 순리를 잘 알고 있다. 절망은 길게는 페이즈이고 짧게는 쇼트이다. 그런데 페이즈든 쇼트든 절망엔 끝도 있고 시작도 있어서 우리는 자꾸만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것이 인생의 아이러니이고 이 중에서도 어떤 페이즈 혹은 쇼트 혹은 아이러니 자체가 독특해서 시간이란 로직에 맞물리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는 팔릴 수 있고 읽힐 수 있고 강 건너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다. 그때부터 이야기는 여러 이름을 얻는다. 소문이었던 게 전설이 되고 전설로 믿어지던 게 역사가 되고 역사로 기억되던 게 아직 아이러니 단계에 놓인 수많은 인생의 이정표가 되고 이념이 된다. 그런 면에서 내 인생이 모지리라는 사실은 퍽 슬프다.
그러나 아무리 슬프다고 이야기하면 무엇하는가. 한 절망 끝내고 돌아서면 또 절망스러운 이 궤도 위에서 우리가 개미처럼 사랑하는 건 아무 의미 없는데. 그러자 사람들이 발끈하고 나선다. 자기가 팔아넘긴 유서가 몇 장인지 자랑한다. 아무래도 그런 건 이야기가 될 수 없을 건데, 왜 그랬죠? 물었다가 얻어 터졌다. 죽음 가까이 갔던 손에 죽도록 얻어 맞았다. 무언갈 얻는다는 건… 그런 생각을 하다가 혼미해진 정신 틈으로 누군가의 새로운 신음을 들었다. 털이 곤두 서는 그 신음을 나는 여름이라 부르기로 했었지?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고 잠깐 활기를 되찾는다.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린다. 나는 나야. 하고 말한다. 누구는 받았고 대부분은 받지 않았다. 내가 키우는 외로움이 이토록 무럭무럭 물캉물캉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서, 오늘은 술을 진탕 마실 것이다. 아무도 같이 마셔주지 않는대도 나는 혼자 그럴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위대해지는 꿈을 꾸지 않을 것이다. 햇볕 아래 시집을 말리는 사람들 잘 들으세요. 그 방에서 한 발자국만 빠져 나오면 우리의 위대한 작업이 모조리 배신 당하고 있단 걸 알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두 가지밖에 못해요. 나가거나 나가지 않거나. 우리가 배신하거나 그들이 우릴 배신하거나. 난 후자를 택하고 영원히 슬픈 존재로 남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