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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 Feb 22. 2023

라니에세이 프롤로그

: 성장으로 이끈 알아차림의 순간들

Intro

'삶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이야기 입니다. '성장'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몇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 장면들은 꽤 아픈 성장통이었지요. 하지만 아픔으로만 끝나지 않고 자양분으로 남아있는 기억이기도 합니다. 그 순간을 알아차림하던 가운데에서 글로 써 내려간 경험 덕분에 지금의 '나'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라니에세이를 연재하기로 마음 먹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공부의 한 과정을 마치고 여러 달 동안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의미있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으레 하기 마련인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던 중, 지인으로부터 ‘삶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순간 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성장’이라고 답했습니다. 제 삶에서 저의 성장을 가장 우선 순위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한 가치관의 지점일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머릿 속에서는 몇 장면이 스쳤습니다.


첫 장면은 고등학교 때 입니다. 한 학년에 한 학급씩, 학급의 학생 수가 채 스무 명도 되지 않던 시골 학교를 다녔습니다. 당시 저는 ‘4년제 국립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꿈이었던 여고생이었습니다. 매일 밤 10시까지, 선생님들 마저도 다 퇴근해버린 학교 독서실에서 친구들 두어 명 정도와 함께 남아 입시 준비를 했었지요. 제가 다닌 학교에서는 1, 2, 3학년 전교생 통틀어 진지하게 입시 준비를 한 학생이 열 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면학 분위기라는 것이 딱히 이뤄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있던 아이들은 참 열심히었지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위 아저씨께서 교문을 잠그기 직전, 마지막으로 문 단속을 위해 독서실 문을 노크할 때가 저희들의 하교 시간이었습니다. 수능 D-100일에는 기도 도량으로 영험하다고 알려진 곳, 사리암에 혼자 올라가 할머니 어머니들 틈에서 1박 2일 동안 수능 100일 기도도 했습니다.


사실 그렇게 열심히였던 이유에는 대학교 진학 외에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내가 살았던 그곳, 많은 것들을 감당 해야만 했던 어린시절의 그 환경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도망치듯 고향에서 떠나와 타지에서 홀로 지냈습니다. ‘성장’이라는 단어와 함께 고등학교 3년이 떠올랐던 이유는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그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시간이 흘러 그 마음을 알게 되어서야 어린 시절의 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교에 진학을 하고 유별났던 학교생활도 마쳤습니다. 나름의 가치와 신념을 갖고 첫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안정적인 공간은 아니었지만,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자부심을 느끼며 일했습니다. 그런데 환경이 여러가지로 바뀌게 되면서 더 이상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경험과 관계를 놓아버려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건 10년 가까이 했던 인연들과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점이었습니다. 20대 전부를 기대고 의지했던 인연들. 이제 더이상은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처음 했습니다. 두렵고 불안했지만, 정서적 독립을 결심한 그때가 ‘성장’이라는 단어와 함께 두 번째로 스쳐간 장면입니다.


세 번째 장면은 두 사람과 관련이 있습니다. 2년 전, 아주 많이 미워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실은 ‘미움’이라는 감정을 넘어섰던 같기도 합니다. 그를 대하는 제 시선과 말투에는 냉소로 가득했으니까요. 그를 향한 싫은 감정이 점점 커져갔고, 그럴수록 저는 더 괴로워졌습니다. 상대방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 사람 때문에 괴로움에 빠져 있는 제 자신이 억울했습니다.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이 절박했습니다. ‘나는 왜 그를 싫어할까’, ‘그의 어떤 모습을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나 싫어했던 적이 이전에도 있었나.’ 미움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가 선택한 방법은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서 찾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를 찾아가는 시간도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미움이라는 감정을 일으키고 있는 제 자신을 이해해야만 했으니까요.


그때의 제 자신을 이해하는 데 떠올랐던 키워드 역시 ‘성장’ 이었습니다. 그가 나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이 제가 찾은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유년 시절,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던 사람. 어쩌면 내 삶에 장애물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알아차린 후엔 오랫동안 아팠고, 많이도 울었습니다. 미움과 냉소의 시작점인 유년시절을 마주하는 건 또 다른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후 그와의 사이가 눈에 띄게 개선된 것은 아니지만, 그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더 이상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삶에 중요한 키워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여러 장면이 스치면서, 저는 제 자신에게 또 다른 질문을 남기고 있더군요. ‘그렇다면 나는 지금 성장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다시 던져진 질문에 답을 내리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나의 성장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몰라서였을까요. 성장한다는 것은 삶의 지향점으로 다가가는 과정일텐데, 진실되게 나아가고 싶은 길의 방향을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주문처럼 외우고 있던 다짐에서 비로소 그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던간에 놓치지 않아야 할 것.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에 대한 알아차림’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글을 써야겠다는 결심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SNS에 ‘라니에세이’라는 계정을 만들고 긴 글을 써왔습니다. 스스로를 남과 비교하며, 못난 사람이라 여기던 때가 있었죠. 나에 대한 불만족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빚어낸 결과물이었습니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위축되어 있던 그때, 어느 스님의 에세이를 읽으며 위로를 많이 받았습니다. 스님의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그 일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스님의 시선이 좋았습니다. 가치 있는 삶이란 누군가가 알아주는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삶과 비교하여 느끼는 우월함에서 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그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삶의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도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스님처럼 내 삶을 소중하고 따뜻하게 대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라니에세이는 시작됐습니다.


라니에세이는 불교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마음 공부를 하고, 명상과 기도와 수행을 하며 써 내려간 글입니다. 제 마음을 살피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선물처럼 다가온 것들을 소회하는 글이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은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에 대해 알아차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성장 욕구는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두렵고 불안했던 시기에 홀로서기를 했던 건 성장의 진정한 시작점이 아니었을지, 그리고 내 앞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오히려 나의 성장을 도운 존재였다는 발견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림 하는 가운데서 얻게 된 성찰이었습니다.이 사실을 알아차림하는 순간 얽혀져있던 관계,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느꼈던 경험은 예상하지 못했던 소중한 결실이었습니다.


다시 질문을 떠올려봅니다. ’나는 지금 성장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다시 글을 쓰며 순간순간 일어나는 마음을 좀 더 진중하게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요즘 제게 수행의 의미는 ‘나’라는 존재를 알아가고, 내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함에 있으니, 글을 다시 쓰는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할 마땅한 일 입니다. 여전히 제가 알지 못하는 저의 모습, 덮어두거나 외면했던 이야기들이 있을 겁니다. 혼자서 힘으로만 풀어가지는 못합니다. 지금까지 써 온 글에서도 그랬듯, 라니에세이는 순간순간 제 자신을 살려낸 부처님 말씀 속에서, 수행이라는 한 길을 걸어가는 분들과 나눈 법담 속에서 피어날 겁니다. 기도를 통해 밝아진 마음을 고백하기도 하고, 점심시간 산책을 하며 매듭 지은 사유를 담아보기도 하겠습니다. 하늘, 바람, 꽃, 나무의 결을 느끼는 순간간에도 제 이야기는 시작되리라 생각합니다. 일체가 곧 자비의 현현이라는 말씀을 기억해봅니다. 제 마음을 돌아보는 것도 결국 모두의 도움으로 가능한 일임을 새삼 느낍니다.


글은 보름 간격으로 연재합니다. 보름달이 차오르고, 차올랐던 달이 비워지는 시간 동안, 한 달에 두 번씩 연재합니다. 제 마음 또한 달과 같이, 새로이 알아차리게 된 것들로 채워지면서도, 마침내는 그것들마저 비워내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연재일인 1일과 15일에 대한 또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초하루(음력 1일)와 보름(음력 15일)에 의미있는 의식을 치르기도 합니다. 전통 사찰에서 치르는 초하루 기도는 새로이 한달을 맞이하며 발원하고 안녕을 염원하는 시간입니다. 음력으로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10월 15일부터 1월 15일까지는 수행자들이 수행에 전념하며 진리를 구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1일과 15일에 연재하는 글은 제 마음을 살피고 관찰하는 수행담이기도 하고, ‘나’로서 살게끔 도와주는 모든 존재들을 향한 기도글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을 알아차리다보면 붙잡아두려 했거나, 회피하려고만 했던 것들도 서서히 흘려보낼 수 있겠지요. 내려놓음은 그 자체가 이미 아름다움이라 했듯이, 그 아름다움으로 제 삶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제 삶의 지향점을 향해 저는 지금 얼마나, 어디쯤 가고 있을까요. 그 길을 가늠해 볼 여정이기도 한, 이 시간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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